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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사부여'''(曷思夫餘, [[22년]]~[[68년]])는 [[부여]] [[대소왕]]의 막내동생인 [[갈사왕]]이 [[갈사수]] 가에 세운 나라이다. '''갈사'''(曷思) 또는 '''갈사국'''(曷思國)이라고도 한다.
 
== 역사 ==
갈사부여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소국으로 [[대소왕]]의 막내 동생인 [[갈사왕]]이 [[22년]]에 세운 나라이다. 22년 2월에 [[대소왕]]이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부여가 혼란에 빠지자 [[갈사왕]]은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예감하고 따르는 무리 100여 인과 함께 피신하였다. 4월 경에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렀을 때,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그를 죽인 뒤 백성을 빼앗아 [[갈사수]](曷思水) 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다.<ref>[[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고구려 본기]]〉 제2,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2010년, 348쪽.</ref>
 
갈사왕의 손녀가 [[고구려]]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 되어 [[호동]]을 낳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는 친선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갈사부여는 고구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그 대신 안전을 보장받은 것으로 보인다.<ref>박영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75383 《한권으로 읽는 고구려 왕조 실록》], 웅진닷컴, 2004년, 87~88쪽.</ref>
 
[[갈사왕]]의 아들의 이름이나 재위년은 전하지 않으며, 손자인 [[도두왕|도두]](都頭)가 즉위한 뒤 [[68년]]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치고 [[우태]](于台)라는 벼슬을 받았다.<ref>[[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고구려 본기]]〉 제3,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2010년, 361쪽.</ref> 이로써 갈사부여는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 위치 ==
갈사부여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갈사왕]]이 [[압록곡]]에압록곡에 이르러 [[해두국왕]]을해두국왕을 죽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현재의 [[압록강]] 북쪽<ref>권덕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0072500209203001&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20-07-25&officeId=00020&pageNo=3&printNo=114&publishType=00020 〈조선민족과 문화상으로 본 백구백인(百區百人)〉, 《동아일보》], 1920년 7월 25일</ref> 또는 [[발해만]] 일대로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갈사'라는 말은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표기한 것으로서,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 지역을 말한다고 하면서,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北曷思)라 일컫고 이남을 남갈사(南曷思)로 일컬었다고 주장하였다.<ref>저자 신채호, 역자 김종성,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521663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역사의 아침, 2014년</ref> 이 주장에 따르면, 갈사부여의 위치는 두만강 북쪽 지역이 된다.
 
== 역대 국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