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산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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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산'''(飽山) 또는 '''포산당 혜천'''(飽山堂 慧天, [[1912년]] [[10월 12일]] ~ [[1971년]] [[9월 6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불교]] [[조계종]] [[승려]]였다. 그의 집안이 [[1896년]](고종 33) 5촌 당숙 좌옹 [[윤치호]]가 [[기독교]]([[감리교]])로 개종한 이후의 첫 [[불교]] 승려이기도 했다. 구한 말 군인 출신 기업인 악연 [[윤치성]]의 아들이었다. 본명은 윤달선(尹達善)이다. 법명은 혜천(慧天)이고, 당호는 포산이다. 별명은 '''지리산의 도인'''<ref> 박부영, 원철, 김성우, 석영당 제선선사 (비움과소통, 2011) 40</ref>이다.
 
그를 스승으로 출가한 승려들 중에는 석영당 제선(夕影堂 濟禪), 도일, [[태고사]] 주지를 지낸 혜우(慧佑), [[의성]] [[고운사]]의 정도원 선사, 일타의 친형인 월현, 일타의 둘째 외삼촌인 영천, 향엄당 성련, 혜원, 문정영, [[법주사]] 조실 효일당 범행<ref>[http://cjbbs.co.kr/home/bbs/board.php?bo_table=02_6&wr_id=724&page=20 효행당 범일스님 법랍 64세 원적] 청주불교방송 2012.01.15</ref>, 경해법인(鏡海 法印) 등이 있다.
 
[[만공 (승려)|만공]]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하여 [[합천군]] [[해인사]], [[논산군]] [[개태사]] 등에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불교]] 승려로 활동하던 그는 당숙 [[윤치호]] 등 소수의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그는 여승으로 있다 환속한 김광영의 중매로 기계유씨 유치두(兪致斗)의 딸 유진팔(兪鎭八)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종단은 [[조계종]]단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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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
[[1945년]]부터 [[1948년]]까지는 [[금산군|금산]] [[태고사]]의 조실로 있었다. 예지력과 통찰력으로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받던 포산은 해방[[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결혼을 하며 환속했다. 포산이 환속하자 그의 사형, 사제들 및 제자들 중에는 그와 절교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포산은 환속했지만 그의 명성은 유명해서 여러 스님들이 변치 않고 찾아왔다. 포산을 [[불교]]로 인도한 청담 스님은 자주 찾아와서 예전처럼 친분을 나누었다.<ref name="ppp43"> 박부영, 원철, 김성우, 석영당 제선선사 (비움과소통, 2011) 43</ref> 그러나 그가 환속한 후에도 일부 상좌 스님들은 그를 시봉하였고, 환속인가 대처승인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해방 이후 그는 [[돈암장]]과 [[이화장]]에도 출입했다. 숙부 윤치영이 초대 내무부 장관에다가 이승만 대통령과 밀접하여 위세가 대단했다. 1921년부터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수시로 이승만과 밀접하게 접촉하던 윤치영은 이승만의 비서실장과 내무부장관, 주프랑스 대사 등을 역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