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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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영사관 소속 경관 6명이 이 공사를 강행하고, 일본 경찰 60명이 중국 농민의 반대를 무력으로 억압하여 이 수로공사는 [[1931년]] 6월 말에 준공되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중국 농민 약 400여 명이 [[7월 1일]]에 봉기하여 이 관개수로 약 2리를 매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써 현장에 있던 조선족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한국인 주민 사이에 일대 충돌이 일어났다. 7월 2일 장춘의 일본 영사관은 무장경찰관 15명을 파견하였고, 중국 측도 300명의 경찰관을 파견하였다. 다시 일본 경찰은 무장경찰관을 증파하였고, 이들의 경계 아래 개간공사를 진행시켜 7월 6일 공사를 완성하였다. 일본 경찰은 중국인 농민에게 무차별 발포하였으나, 약간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 인명피해는 없었다.
 
== 사건의 반향과 반중국인과 한국인 폭동충돌 ==
 
중국 국민당 정부측은 일본측의 대응에 강경하게 대항하였으나 일본은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매한 태도만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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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첫 보도를 내었던 조선일보 기자 김이삼은 정정보도와 사죄문을 조선일보에 발표한 다음날 조선인에게 피살되었다. 김이삼이 일본의 특무기관에 의하여 살해당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ref>야마베 겐타로,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 255쪽, 어문학사</ref>
 
폭동으로충돌로 인해 127명(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만 94명)의 중국인 사망자가 있었으며, 부상자가 400명이었고 손해는 250만 원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본질은 만주에 세력을 형성한 중국 민족운동 세력과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의 반일 공동전선투쟁에 대해 중국인과 한국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려는 일본의 치밀한 음모였으며, 이를 만주 침략과 대륙 침탈의 발판으로 삼고 국제적으로는 자기 입장을 유리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조선 총독부]]와 일본 경찰은 이 사태를 방관하는 한편, 형식적으로 제지의 태도를 보였으나 극히 소극적이고 냉담하였다. 그러나 이 폭동이충돌이 가라앉자 총독부 당국은 단호한 태도로 광범위한 검거를 시작하였다. 이후 중국에서는 조선인 배일운동이, 일본에서는 만주 침략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만주 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조선인의 폭동은싸움은 만몽 침략정책을 가진 일본제국주의가 고의로 선동, 촉발한 것이라고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ref name="이이화"/>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거센 배일운동이 일어났다.<ref name="이이화"/> 중국의 국민당 기관지인 중앙일보와 민국일보 등은 만보산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배일운동을 전개했다.<ref name="이이화"/> 특히 중국과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연합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했다.<ref name="이이화"/>
 
== 기념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