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3세 바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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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3세 바사'''({{llang|pl|Zygmunt III Waza}}, {{llang|sv|Sigismund Vasa|시기스문드 바사}}, [[1566년]] [[6월 20일]] ~ [[1632년]] [[4월 19일]])는 [[폴란드]]의 [[폴란드의 군주|국왕]](1587~1632)이며, [[1592년]]부터 [[1599년]]까지 [[스웨덴]]의 [[스웨덴의 군주|국왕]]을 겸하였다.
 
[[스웨덴]] 그리프스홀름(Gripsholm)에서 [[스웨덴의 군주|스웨덴 국왕]] [[요한 3세]]와 [[폴란드의 군주|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딸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쪽으로는 [[바사 왕가]]에 속하며, 그를 [[가톨릭]]으로 키운 어머니 쪽으로는 [[야기에우워 왕조]]에 속하였다. [[1587년]] [[8월]] 그의 삼촌 [[스테판 바토리]]의 뒤를 이어 폴란드의 국왕에 선출되었다.
 
왕좌를 얻기위하여 그는 왕실 권력의 축소와, 국회 권력의 증강에 중요함을 받아들여야 하였다. [[1592년]] [[오스트리아]]의 황녀 [[오스트리아의 안나 (1573년)|안나]]와 결혼하였고, 같은 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국회로부터 스웨덴 왕좌의 허락을 받았다. [[1594년]] 스웨덴의 [[루터교]] 주의를 유지만을 약속한 후에 스웨덴 왕위에 올랐다.
 
섭정으로서 그의 삼촌 칼(후에 [[칼 9세]])을 떠나 [[1594년]] 폴란드로 귀국하였다. 칼 9세가 반란을 일으키자, 지그문트는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스통게브로(Stångebro)에서 패배를 당하였고, [[1599년]]에 스웨덴 왕좌에서 축출당하였다. 지그문트의 외교 정책은 스웨덴 왕좌의 복권에 목적을 두었고, [[1600년]]부터 스웨덴과 폴란드는 단속된 [[전쟁]]에 관련되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제휴를 지속하는 데 시도하였다. [[1598년]] 안나 왕비가 사망하자, [[1605년]] 그녀의 동생 [[오스트리아의 콘스탄치아|콘스탄치아]]와 재혼하였다. 국회에서 전원 합의의 대다수 규칙을 소개한 그의 노력에 의한 자극을 받은 반대자들에게 내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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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왕자}}
{{생몰년|1566|1633|지그문트 3세}}
{{Authority control}}
 
{{생몰년|1566|1633|기본정렬:지그문트 3세}}
[[분류:1566년 태어남]]
[[분류:1633년 죽음]]
[[분류:폴란드의 군주]]
[[분류:스웨덴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