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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년]] 다시 문과에 급제,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동년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의 낙향 소식을 접한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그해 [[7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바로 [[일본]]과 강화를 하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해 [[10월]] [[이기 (1476년)|이기]]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와 같은 무리라는 탄핵을 당하고 파직당하였다.
 
[[1545년]] [[10월]]말 [[이기 [[(1476년)|李芑]]가 다시 그에게 죄가 없다고 하여 다시 복관된다. 그 뒤 사복시 정 겸 승문원 참교, [[1546년]](명종 2)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그해 [[3월]]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지어 사은사 남세건의 탄핵을 당하였으나,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의 변호로 처벌을 모면하였다. 그해 [[8월]]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거쳐 [[1547년]] [[7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부임했다가 1개월 만에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 지방관 생활과 낙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