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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뒷날 [[이익 (1681년)|이익]]이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는 허목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이때까지 이익 집안의 학문은 성리학적 흐름과는 무관하였으며, 오히려 주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ref name="신항수1"/>
[[1699년]] 이잠은 정시한을 예방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퇴계학 수용의 증거로 지목된다.<ref name="신항수1"/> 정시한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1715년]]에서 [[1720년]] 사이 [[이익 (1681년)|성호 이익]]은 전대에 거리가 있었던 허목과 이하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허목을 자신이 사숙한 스승으로 규정하였다.<ref name="신항수1"/> 서인 노론이 율곡 이이를 자신들의 학문적 뿌리로 삼은 것에 대항해서, 이익은 서울 지역(近畿) 남인들의 학문적 근원을 이황에서 찾으려 시도했다. 이익은 47 논쟁에 관한 책을 쓰고, 또 이황의 글을 발췌한 {이자 수어}도 편찬한다. 이러한 시도는 서울지역 남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ref name="신항수"/> 한편 이익은 [[허목]]의 후학으로 자정한 이후에도 경전해석이나 경세론 분야에서는 여전히 윤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윤휴와의 계통을 강조하였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 경향을 보였다. [[윤휴]]를 강조하던 인사들이 신유 박해로 몰락하면서 성호 학파의 학통은 오로지 퇴계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전승되게 된다.<ref name="신항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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