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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가택 화재(火災) ===
[[1907년]]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여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됐다. 하루는 이완용이 어전회의에서 항일 의병장 [[허위 (許蔿,[[1854년)|허위]] [[4월 1일]]~[[1908년]] [[10월 21일]])의 처형을 [[대한제국 순종|순종]]황제에게 주청했다. 그는허위는 황실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의 간부 출신으로, [[1898년]] [[6월 30일]]부터 같은 해 11월 황국협회와 독립협회가 동시 해체될 때까지 [[보부상]] 등을 시켜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했던 [[독립협회]]를 해체하기 위해 각종 사보타주<ref>사보타주: 상대방의 사유재산등을 고의적으로 파손해 본인의 항의 의사를 주장하는 행위. 노동쟁의의 경우 태업등의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ref> 를 가하는 등<ref>{{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근대사 산책 3 (개화기편,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장=제5장 만민공동회의 도전
|꺾쇠표=예
}}</ref> 황실의 더러운 심부름을 했던 전력도 있었다. 서구식 참정권을 주장했던 독립협회를 해체하려고 황실과 수구 내각은 [[황국협회]]를 동원해 진흙탕 싸움을 만들었었다. 어찌보면 황실로서는 공이 있는 인물이었으나 정상은 참작되지 않았다. 이완용의 사형 주청 사실이 알려지자 옛 황국협회 지지자들과 화가난 민중들이 몰려와 그의 집에 불을 놨다. 그래도 이때는 조기에 진압하여 조상들의 위패와 재산의 대부분을 지켰다.
 
=== 사태 무마 목적의 남인,북인등의 복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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