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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대는 [[네덜란드]] 육군에서 따온 육군 편성이다. 당초 일본의 육군의 역할은 외국 정벌이 아니라 [[보신 전쟁]] 후의 국내 치안 유지였다. 따라서 평시의 편성된 진대만으로는 전시에는 기동성이 떨어지는 진대를 [[여단]](메이지 18년부터 [[사단]])으로 임시 개편하기로 했다.
 
먼저 태정관이 장래 전국에 진대를 둘 것을 밝힌 뒤 [[1871년]] [[6월 10일]] 현재의 동북 지방에 동산도 진대(본영 이시노마키, 분영 후쿠시마, 모리오카), 현재의 규슈 지방에 서해도 진대(본영 오구라, 분영 하카타, 히타) 2개의 진대를 설치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부대 편성을 한 것은 서해도 진대뿐이었다. 같은 해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에 의해 전국이 [[메이지 정부]]의 직할되었지만, 동시에 병부성 직원령이 내려진 홋카이도, 이시노마키, 도쿄, 오사카, 오구라 5 진대제의 구상이 제시되었다.<ref name=TF>[http://www.furuyatetuo.com/bunken/b/54_hohei9/1_1.html 『新修 大津市史』5 근대 제1장 근대大津の出発]([[도쿄 대학 인문과학 연구소]] 元教授 [[古屋哲夫]] 저 1982년 7월)</ref> 그러나 다른 지방보다 인구가 극단적으로 적은 홋카이도에서는 진대의 설치가 뒷전이 되었다. 그 결과 그 해 [[10월 4일]]에 옛 두 진대를 폐지하고 도후쿠 진대(센다이), 도쿄 진대, 오사카 진대, 규슈 진대([[구마모토]])의 4 진대가 설치되었다. <ref name=TF/> 이 때의 진대는 어친병에서 전환된 자와 사족 지원자로 편성되었다. 남각번남아 있던 각 번의 상비병은 무장 해제를 했다. <ref name=TF/>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