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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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단 ==
일본은 [[메이지유신]](1867년)을 통해 안으로 중앙집권화와 제도개혁을 단행하고, 밖으로는 침략전쟁을 벌여 반대파의 힘을 외부로 돌리려 하였다. 이러던 중 일본은 이웃나라 조선에서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어(1873년 11월) 조선을 문호개방 시킬 기회를 포착하였다. 이리하여그러나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설|조선이 문호개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열강 세력에 앞서 무력시위로써 조선을 개항 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군함 5척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875년 9월(고종 12년) 일본 정부는 군함 운요호와[[운요호]]와 다른 한 척을 부산항에 정박시켜 함포 시위를 하고, 곧이어 운요호를 동해 [[영흥만]]에까지 북항시켜 해로측량과 무력시위를 하였다.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설|조선이 문호개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열강 세력에 앞서 조선 진출을 시도하는 계획이 늦어짐에 따라 그 타개책으로 무력시위로써 조선당국을 굴복시키고자 군함 5척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 뒤 [[운요호]]를 파견하였다. 자신들이 개항을 강요당했던 그 수법을 자신들이 조선에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7년)을 통해 안으로 중앙집권화와 제도개혁을 단행하고, 밖으로는 침략전쟁을 벌여 반대파의 힘을 외부로 돌리려 하였다. 이러던 중 일본은 이웃나라 조선에서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어(1873년 11월) 조선을 문호개방 시킬 기회를 포착하였다. 이리하여 1875년 9월(고종 12년) 일본 정부는 군함 운요호와 다른 한 척을 부산항에 정박시켜 함포 시위를 하고, 곧이어 운요호를 동해 [[영흥만]]에까지 북항시켜 해로측량과 무력시위를 하였다.
 
==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