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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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1875년]] [[9월 20일]]([[대한제국 고종|고종]] 12년, [[음력 8월 21일]]) 또는 '''강화도 사건'''(江華島事件)은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 발단배경 ==
일본은 [[메이지유신]](1867년)을 통해 안으로 중앙집권화와 제도개혁을 단행하고, 밖으로는 침략전쟁을 벌여 반대파의 힘을 외부로 돌리려 하였다. 이러던 중 일본은 이웃나라 조선에서 쇄국정책을 펴던 [[흥선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어(1873년 11월) 조선을 문호개방 시킬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설|조선이 문호개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구미 열강세력에 앞서 무력시위로써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군함 5척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875년 9월(고종 12년) 일본 정부는 군함 [[운요호]]와 다른 한 척을 부산항에 정박시켜 함포 시위를 하고, 곧이어 운요호를 동해 [[영흥만]]에까지 북항시켜 해로측량과 무력시위를 하였다.
 
== 결과발생 ==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이번에는 서해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식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보트에 군인을 분승시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 포대까지 접근하였다. 조선군의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법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에서도 맹포격으로 응수하였다.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우세인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永宗鎭)에도 맹포격을 가하면서 [[일본 해군 육전대|육전대]](陸戰隊)까지 상륙시켜 살인ᆞ방화ᆞ약탈을 자행하였다. 일본은 한편으로 부산에 전함을 파견하고 병사를 상륙시켜 [[함포외교]]를 계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