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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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헨리 3세 때부터 있어 온 외국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책을 썼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토지 등 부동산의 양도 및 상속에 관한 중요한 법률을 만들어 '영국의 유스티니아누스'라 불리었다.
 
재판 행정 제도를 확립하고 일련의 제정법(制定法)을 발포, 봉건사회의 질서 유지에 노력하였다. 또 산업에 주력하고 1285년 상인법을 발령, 양모와 가스코뉴의 술 생산을 장려하였다.그는 프랑스 왕에게 신종(臣從)하여 대륙에 있어서 [[나바라]], [[카스티야]]의 왕위계승문제, [[아라곤 왕국|아라곤]] 왕 알폰소와 교황·프랑스 왕 필리프 단려왕(端麗王)과의 조정(1291)에 활약이 컸다. 1295년 성직자와 귀족, 각주에서 2명의 기사 및 도시의 대표를 모아 '모범 의회'를 열어 영국 의회의 기초를 쌓았다. 말년에 단려왕의 [[가스코뉴]], [[플랑드르]] 공격을 받아 1303년 파리 협정에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또 스코틀랜드의 반란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조달 때문에 국내의 반란을 유발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1307년 그가 정복하였던 스코틀랜드가 [[로버트 1세]]를 중심으로 독립하자 이를 정벌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던 도중 그해 7월 7일 칼라일 근방에서 장남 [[에드워드 2세|에드워드]]를 불러 “나를 화장하여 뼈를 가죽 부대에 넣어 군사들과 함께 진군하라. 그리고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장악했을 때 묻어 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사망하였다.<ref>[[미셸 드 몽테뉴]](1580), 《[[수상록]]》, Traduction Michaud. Firmin Didot, 1907 〈[[:s:fr:Essais/édition Michaud, 1907/Livre I/Chapitre 3|Livre I/Chapitre 3]]〉“Édouard premier, roi d'Angleterre, ayant constaté dans ses longues guerres contre Robert, roi d'Écosse, combien sa présence contribuait à ses succès, la victoire lui demeurant partout où il se trouvait en personne ; sur le point de rendre le dernier soupir, obligea son fils, par un serment solennel, à faire, une fois mort, bouillir son corps ; pour que, les chairs se séparant des os, il enterrât celles-là et transportât ceux-ci avec lui à l'armée, chaque fois qu'il marcherait contre les Écossais ; comme si la destinée avait fatalement attaché la victoire à la présence de ses ossements.”; 손우성(孫宇聲) 역 (1983), 학원출판공사(學園出版公社), 34쪽.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란드의 로버트 왕과의 사이에 일어난 오랜 전쟁에서, 자기가 몸소 출전(出戰)했을 때에는 늘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지휘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고는, 죽은 뒤에도 자기의 시체를 삶아서 살과 뼈를 갈라, 살은 묻고 뼈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스코틀란드 군과의 대전(對戰) 때에 이 유골(遺骨)을 가지고 출정(出征)하라고 자기 아들에게 엄숙히 맹세시켰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