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61번째 줄:
 
충청수사 [[최호 (조선)|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당황하여 도망칠 궁리만 한 원균과 달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주해 [[한산도]]에 있는 군수물품을 전부 불태우고 도망을 쳤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귀선) 3척 <ref> 《사대문궤》에 따르면 5척 </ref>을 포함하여 배설이 이끌고 도주한 12척의 판옥선을 제외한 판옥선들은 전부 침몰하였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띠고 있다. 우선 조선수군이 붕괴됨으로써 남해의 재해권이 넘어가 실질적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한위략에 적힌 일본군의 전과는 170척 수준으로 판옥선과 기타 선박(협선)을 포함 300척이100여척 이 넘는 조선 수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상당히 적은 규모로, 일본은 칠천량 해전의 의미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전과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초기에 조선 수군을 공격한 일본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포로가 되었던 정기수 역시 소수 병력이 기습했는데 수군이 적이 많은 줄 알고 도주했다고 진술하였다.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 역시 왜인들의 말을 빌어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수군 함대에 왜선 한 척이 접근해 [[조총]] 한 방을 쏘자 조선수군 함대가 놀라 도망치다가 스스로 무너졌다고 기록했다.그 이후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하다가 [[명량해전]]에서 결국 승리하다가,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의 최후의 승리로 [[이순신]]이 전사하고 [[임진왜란]]이 끝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