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스기 신사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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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이력 ==
다카스기는 [[조슈 번]] (현재의 [[야마구치 현]] ) [[하기 시]]에서 중류계급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났다. 1852년 다카스기는
===유학===
[[1861년]] 분큐 원년에는 해군 수련을 위해 번이 소장하고 있던 군함 헤에신마루(丙辰丸)를 타고 에도를 통과한다. 신도무념류(神道無念流) 연병관 도장에서 검술을 익힌다. 8월에는 [[도호쿠 지방]]을 여행하고 [[사쿠마 쇼잔]]이나 [[요코이 쇼난]] 등과 친분을 쌓았다. [[1862년]] 5월에는 번의 명령으로 고다이 토모아쓰 등과 함께 막부 사절 수행원으로 [[나가사키]]에서 [[청나라]] [[상하이]]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청나라가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해가고 있는 실정이나 [[태평천국의 난]]을 견문하고, 7월에 귀국하였다. 일기인 《유청오록》(遊清五録)에 따르면 이 경험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존양왕이 운동===
조슈번은 신사쿠의 여행 중에 수구파였던 [[나가이 우타]]가 축출되고, [[존왕양이파]]가 부상했다. 신사쿠도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와 구사카 요시스케([[구사카 겐즈이]]) 등과 함께 존왕양이 운동에 참가하여 에도, 교토에서 근황, 파약, 양이의 선전 활동을 펼쳐 각 번의 지사들과 교류를 했다.
[[1862년]], 신사쿠는 “사쓰마한은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에 있는 오랑캐를 척살]]하고, 양이의 열매를 거뒀는데, 우리 번은 또 공무합체를 말하고 있다. 뭐든 양이의 결과를 거두어야 한다. 번 정부에서 이를 단행할 수 없다면”이라고 주장했다.
다카스기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번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였는데, 당시 그는 양이운동의 선봉에 서서 극단적으로 서양 세력의 배척을 주장하였다. [[1862년]] [[12월 12일]]에는 막부의 칙령에 항의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시나가와 고텐야마에 건설 중인 영국공사관을 방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격한 행동이 막부를 자극할까 두려워 한 번에서는 신사쿠를 에도에서 소환한다. 이후 요시다 쇼인의 탄생지인 마쓰모토 마을에서 초가집을 짓고, 동행(이미 업무)이라고 자칭하고, 십년의 은둔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 해외 탐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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