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궁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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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특별히 전하여 기록된 것이 없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는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꿍꿍이셈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ref>광해 69권 5년 8월 11일 11번째기사 / 이이첨과 김상궁 개시에 관한 비교 평가</ref> 『[[연려실기술]]』에 [[광해군]]보다 나이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임진왜란]]이 발발([[1592년]])하기 10년 전에는 입궁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광해군을 모시는 궁녀가 되었다. 어머니인 공빈 김씨를 일찍 여읜 소년 광해군의 시중을 들면서 광해군에게 신임을 얻기 시작하였고, 광해군이 가례를 올린 후에 그의 심복이 되어 왕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조선 선조|선조]]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받아 특별상궁이 되었고, 민첩하고 꾀가 많아 선조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계축일기』에는 '가희가히'라고 적혀 있는데, 나인그녀의 시절이름 선조에게'개시(介屎)'는 승은을기존에 입고흔히 알려져 이름을있는 받았다고'개똥이'가 한다아니라 '가히'의 한자식 표기인 것으로 보인다.<ref>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43109.html</ref>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위해 광해군을 추종하는 세력과 손잡고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고,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선조의 유일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유폐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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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 김씨는 권신 [[이이첨]]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는 등 그 해독이 커서 [[윤선도]]ᆞ[[이회]](李洄) 등이 여러 번 상소하여 논핵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었다. 조야집요에 따르면, 그녀의 권력은 중전 유씨를 능가하여 광해군이 어느 후궁의 처소에 침소를 드는 것까지 광해군에게 직접 정해줬다고 한다.
 
{{출처|추후 그녀는 반정의 조짐이 보이는 것을 알게 되자 이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자, 결국 광해군을 배신하고 반정의 주력인물인 김자점에게 뇌물을 받고 반정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반정을 묵인하였고, 수차례 반정 상소를 받었던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광해군은 구체적인 반정자 명단이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김개시의 말을 듣고 묵인해버렸고 상소는 폐위되기 하루 전까지 계속 올라왔었지만 김개시는 광해군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다.}}<ref>《속잡록》계해년 1월</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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