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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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사이트 =
}}
'''이재극'''(李載克, [[1864년]] ~ [[1931년]]<ref> {{저널 인용
|저자=전봉관
|제목=<nowiki>[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④]</nowiki> 이인용 남작 부부의 ‘소송 전쟁’
|url=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10/13/200510130500006/200510130500006_1.html
|저널 =신동아
|작성년도연도 = 2005
|작성월 =10
|issue=553호
|쪽=454~469쪽
|꺾쇠표=예
}} </ref>)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호는 만송당(晩松堂)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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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부터 관직에 들어섰고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치른 [[명성황후]]의 장례에서 종척집사(宗戚執事)를 맡는 등 왕실 주변에서 여러 벼슬을 지냈다.
 
[[1900년]]에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면서 요직을 맡기 시작하여, [[1903년]]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일본 제국|일제]]와 밀착하여 황실의 동정을 탐지하여 제공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서는 [[궁내부대신]]으로 일제의 뜻에 따라 고종을 협박하는 일을 맡았고, 종친 중 대표적인 친일파로 지목되어 [[나철]]이 [[을사오적]]을 암살하기로 했을 때 암살 대상자로 꼽혔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9년]] 구 황실을 담당하는 [[이왕직]] 장관에 임명되어 계속해서 일제에 협조하며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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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http://h21.hani.co.kr/section-021106000/2005/08/021106000200508230574128.html
|저널 =한겨레21
|작성일자날짜 = 2005-08-23
|issue=574호
|꺾쇠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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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7999
|출판사=오마이뉴스
|작성일자날짜=2007-05-02
|확인일자=2008-05-22
}}</ref> 했으며, [[12월 6일]]에는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재극의 이름이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을 발표했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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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꺾쇠표=예
|발행년도연도=2007
|발행월=12
|id=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