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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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상자 정유재란}}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은 [[1597년]]([[조선 선조|선조]] 30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 [[칠천도]]<ref>[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441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ref>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등이 [[작전 중 사망|전사]]한다. <ref name="ReferenceA"> 《선조실록》, 90권 30년 [[1597년]] [[7월 22일]] 선전관 김식의 보고 장계.. 한편, 원균을 마주친 도원수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 또한 실록에 기재되어 있고 《선조실록》, 90권 30년 [[1597년]] [[7월 26일]], 여러 실록 기록들 중 최소한 종전 이전까지는 원균을 살아있다고 선조나 조정 대신들은 생각한 것 같다. 《선조실록》, 90권 30년 [[1597년]] [[8월 5일]]의 원균 처단 논의 등... 실록에 기록된 선전관 김식의 보고에는 [[원균]]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돼 있지만 도원수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로 원균이 전사하지 않은 게 확인되었고, 조정에서는 [[1601년]]에 이르러서야 원균의 사망을 언급한다. </ref>
== 정유재란의 발발 ==
[[1597년]] [[3월 1일]]([[정유년]] [[음력 1월 14일]]) 임진왜란을 종결시키기 위한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조선의 부산을 재침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음력 7월 8일]]) 일본의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재침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적국(전라도)을 비롯한 조선의 [[하삼도]]를 점령하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하삼도를 점령하려면 보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조선은 의도적으로 도로를 놓지 않아 수송은 전적으로 강과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이행하려면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무너뜨려야만 가능했는데, 일본군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조선 수군의 핵심인 이순신을 제거하게 되었다.
 
종교 문제와 일본내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으로 인해 서로 불화하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공을 두고 경쟁할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재침이 명령되자 임진년과는 달리 [[가토 기요마사]]가 제 1진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어 가토의 도해 정보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다시 공격 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군이 부산에 상륙한 뒤였기에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수행할 수 없었지만 돌연 조정은 꼬투리를 잡아 이순신을 파면하고 대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혔다.
 
이순신의 후임으로 임명된 [[원균]]도 통제사 제직전에 자신의 주장과 달리 사태의 불리함을 깨닫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전하지 않는다. 특히 육군의 엄호 없이는 출전할 수 없다며 [[3월 29일]] 장계를 통해 30만 대군으로 [[안골포 해전|안골포]], [[가덕도]] 등지의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장계를 올린다.<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3006011_003&grp=&aid=&sid=6967&pos=21 원균이 수륙의 병공을 처치해 줄 것을 요청하다], 《선조실록》 89권, 1597년 6월 11일</ref><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3004019_005&grp=&aid=&sid=6967&pos=11 전라 좌수사 원균이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하다]《선조실록》 87권 4월 19일</ref>, 이후에도 적과 싸울 생각없이 소수의 적을 보고도 바로 도주하는등 문제를 일으키다 보다못한 도원수 [[권율]]이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출전시켰다.
(사실 곤장을 친 이유는 원균이 조선조정을 입에 발린 말로 우롱해 괘심하여 친것이다. 곤장을 명령을 듣지 않아 쳤다는 이유는 와전 된 것이다.)<ref>{{웹 인용
|url =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na_13401017_001&grp=&aid=&sid=4706417&pos=1
|제목= 체찰사 이덕형과 국방 문제 전반에 대해 논의하다|확인일자 =|저자= 선조실록|작성일자날짜 = 1601-1-17|출판사= 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 = |인용= }}</ref>
 
== 칠천량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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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지역 춘원포까지 후퇴하여 통제사 원균과 중군장 순천부사 [[우치적]]은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경상우수사 [[배설 (조선)|배설]]은 전선12척을 이끌고 도망을 친다.[[원균]]은 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들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이때 김완은 진해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ref name="ReferenceA"/>
<ref> 《선조실록》, 90권 30년 [[1597년]] [[7월 22일]] 선전관 김식의 보고 장계.. 한편, 원균을 마주친 도원수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 또한 실록에 기재되어 있고 《선조실록》, 90권 30년 [[1597년]] [[7월 26일]], 여러 실록 기록들 중 최소한 종전 이전까지는 원균을 살아있다고 선조나 조정 대신들은 생각한 것 같다. 《선조실록》, 90권 30년 [[1597년]] [[8월 5일]]의 원균 처단 논의 등... 실록에 기록된 선전관 김식의 보고에는 [[원균]]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돼 있지만 도원수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로 원균이 전사하지 않은 게 확인되었고, 조정에서는 [[1601년]]에 이르러서야 원균의 사망을 언급한다. </ref>
 
[[파일:Korea-Geoje-Gohyeon_Castle-01.jpg|thumb|left|160px|거제 고현성]]
 
충청수사 [[최호 (조선)|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당황하여 도망칠 궁리만 한 원균과 달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전사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주해 [[한산도]]에 있는 군수물품을 전부 불태우고 도망을 쳤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귀선) 3척 <ref> 《사대문궤》에 따르면 5척 </ref> 을 포함하여 배설이 이끌고 도주한 12척의 판옥선을 제외한 판옥선들은 전부 침몰하였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띠고 있다. 우선 조선수군이 붕괴됨으로써 남해의 재해권이 넘어가 실질적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한위략에 적힌 일본군의 전과는 170척 수준으로 판옥선과 기타 선박(협선)을 포함 100여척 이 넘는 조선 수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상당히 적은 규모로, 일본은 칠천량 해전의 의미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전과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초기에 조선 수군을 공격한 일본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포로가 되었던 정기수 역시 소수 병력이 기습했는데 수군이 적이 많은 줄 알고 도주했다고 진술하였다.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 역시 왜인들의 말을 빌어 칠천량에 정박한 조선수군 함대에 왜선 한 척이 접근해 [[조총]] 한 방을 쏘자 조선수군 함대가 놀라 도망치다가 스스로 무너졌다고 기록했다.그 이후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하다가 [[명량해전]]에서 결국 승리하다가,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의 최후의 승리로 [[이순신]]이 전사하고 [[임진왜란]]이 끝이났다.
 
== 결과와 영향 ==
[[1597년]] [[5월 16일]]([[음력 4월 1일]])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출옥한 후 남하하여, [[6월 11일]]([[음력 4월 27일]])에 도원수 [[권율]]이 머물고 있던 [[순천]]에 도착하였다.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 패한 후 조선 조정은 다시 [[음력 7월 22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권준]]을 충청수사로, [[김억추]]를 전라우수사로 임명하여 전력을 재편한다.<ref> {{서적 인용
| 저자 = 이민웅
| 제목 = 임진왜란 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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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꺾쇠표 = <>
| 출판사 = 청어람미디어
| 발행년도연도 = 2008-07-24
| 확인일자 = 2008-11-14
| url =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DGT4808989722496
| id = ISBN 10 - 8989722497
}} </ref>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함선이 소실되고, 남해안의 제해권이 왜군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바람에 육군의 지원이 원활하게 진행되어 전라도까지 왜군이 침입하였다. 이때 뺏긴 남해안의 제해권은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왜군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