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정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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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 교체기에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요동을 포함한 [[만주]] 경략을 꾀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고려]]와 여러 가지 알력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1356년]](공민왕 5년)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관서 지방]](關西地方)과 [[관북 지방]](關北地方)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
 
[[1369년]](공민왕 18년) 음력 12월 고려에서는 [[이인임]]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원나라]]의 [[동녕부]]를 치게 하였다. 동북면 원수 이성계는[[이성계]]는 [[1370년]] 음력 1월 [[압록강]]과 [[파저강]](婆猪江)을 건너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가 지키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지용수와서북면 원수 [[지용수]]와 합세하여 요동의 중심지인 [[랴오양|요양]](遼陽)을 공격하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장기적인 점령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부근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하고 회군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외교적으로 반원친명 정책을 폈다. 그러나, 명나라가 감당키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1387년]](우왕 13년), 명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1388년]] 음력 2월 귀국한 [[설장수]](楔長壽)는 '명(明)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하였다. [[1388년]](우왕 14년) 음력 3월,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우왕]]은 8도의 정예 병사 징발을 명령하고, 스스로 평안도로 행차하겠다고 나서면서 요동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6531 명장 최영, 왜 이성계에게 당했나] 오마이뉴스, 2012년 11월 1일.</ref> 고려 조정은 막강한 신흥세력인 [[명나라]]와의 외교적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에 반감을 품고 [[북원]]과 손을 잡고 요동(遼東)을 쳐서 명나라에 본때를 보이는 실력행사를 하자는 주전파(主戰派)로 의견이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