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노부마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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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분세이]] 2년 음력 11월 25일, 이와키 다이라 번의 4대 번주 [[안도 노부요리]]의 적자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고카]] 4년([[1847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이와키 다이라 번주가 되었고, 고카 5년([[1848년]]) [[소자반]]이 되었다. [[가에이]] 4년([[1851년]])에 [[지샤부교]]직을 맡았고, [[만엔]] 7년([[1860년]])에 로주가 되었다. 취임 직후 ‘[[
노부마사는 [[안세이 대옥]]을 일으킨 이이 나오스케의 강경노선을 부정하고 온건책을 취함으로써, 조정과 막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였다. 그 일례로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와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결혼시킨 일을 들 수 있다. 이 무렵 일본 국내 정세의 불안을 비롯하여 [[헨리 휴스켄]]([[:en:Henry Heusken]]) 살해 사건과 같은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였으나 이 일들을 무난히 처리하였으며, 외국과의 조약 체결로 인하여 발생한 금화 유출 문제와 물가 앙등 문제에 대응하여 방지책을 내고 막부 권력의 안정화를 꾀했다.
[[분큐]] 2년([[1862년]]), 가즈노미야의 혼인 문제로 원한을 품고 있던 [[존왕양이]]파 [[미토 번]] [[로닌|낭인]] 등 6명의 습격을 받아 등에 부상을 입었으나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사카시타 문 밖의 변]]이라 하는데, 그 직후 붕대를 감은 채로 [[영국]] 공사 [[
[[게이오]] 4년([[1868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아직 젊은 번주 [[안도 노부타케]]를 대신해 번의 통치를 지휘했고,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신정부군과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이와키 다이라 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노부마사도 항복하였고 근신 처분을 받았다. [[메이지]] 2년([[1869년]]) 9월 10일에 영구 칩거 처분이 해제되었고, 메이지 4년 10월 8일에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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