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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티아라를 건설했고, 그리하여 과거 페니키아 식민시와, 동쪽의 벵가지부터 서쪽의 [[지브롤터]]와 [[포르투갈]]에 이르는 지역([[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일부, [[발레아레스]] 제도 등)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에 면해 있으면서 동시에 육지에 비옥한 경작지를 소유한 탓에 농업에 종사한 가문들과 상업에 종사한 가문들 사이에서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일반적으로 상업 중심파가 정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지중해 서부의 [[헤게모니]]를 확립시키기에 이른다. 기원전 6세기 초반, [[항해자 한노]]가 [[아프리카]] 해안가까지 항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시에라리온]]에까지 도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 ~ 241년) 지중해의 상권을 둘러싸고 점차 팽창하는 [[로마 공화정|로마 공화국]]과 전통적인 해운국이었던 카르타고 사이의 이권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시칠리아]]를 통해 해상으로 진출하려했고, 결국 시칠리아를 둘러싸고 카르타고와 맞붙었다. 23년 간의 전쟁 끝에 로마는 [[한니발]]의 아버지이기도 한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 해군을 격멸시키고 승리를 거두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린다. 유명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의 사군툼을 공격함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갈리아 남부를 돌아 알프스를 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했지만 북부 이탈리아로 침입해서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전술로 만회할 시간을 벌었고 한니발은 결코 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이탈리아 외에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그리스]]에서도 로마군과 카르타고 군이 격돌했으나 끝내는 로마군이 모두 승리했다. 전장은 아프리카로 넘어갔고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카르타고가 결정적으로 패함으로써 16년동안의 이 전쟁은 종결되었다.
카르타고는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기원전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카르타고는 지중해 연안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장악했다. 사르데냐는 광물 자원이 물량으로는 적었으나, [[납]], [[아연]], [[구리]], 철, [[은]] 등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히스파니아 광산은 매장량이 보다 풍부했고, 250년간 계속 채굴했지만 여전히 납, 아연, [[수은]], 구리, [[금]], 은과 수백만 톤의 [[철광석]]을 생산했다. 히스파니아의 [[카디스|가데스]]를 떠난 카르타고인들은 아마 오래전의 페니키아인들이 한 것처럼, 북쪽 [[콘월]]로 항해하여 값진 [[주석 (광물)|주석]]을 배에 싣고 오기도 했다. 이 곳을 거점으로 남쪽으로 아프리카 해안 방향으로 [[황금 해안]], [[카메룬]], 심지어 [[가봉]]까지 갔으며 그곳에서 금, [[상아]], [[노예]], 전쟁용 코끼리를 실어왔다. 카르타고에서 생산한 많은 광물은 본국 주물 공장뿐 아니라 동부 지중해의 [[헬레니즘]] 세계로 운송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전 수세기 동안 동쪽과 서쪽을 잇는 해운업은 사실상 카르타고가 독점했다. 지중해 서부에서 [[고대 그리스|그리스]] 선박이 발견되면 십중팔구는 격침되었다. 이런 정책 덕분에 카르타고 상인들은 그 지역 내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생산한 상품들을 독점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의 제품 중 자유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제품은 직물, 특히 자주색으로 염색 가공한 직물뿐이었다. 카르타고 산 직물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호평을 받았다. <ref>M 하이켈하임, pp.171~172.</ref>
 
카르타고인은 과학적 영농에 특히 노예들을 이용한 집단 농장([[플랜테이션]])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로마인들은 이들에게서 대규모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판매용 단일 곡물이나 단일 산물을 재배하는 기법을 배웠다.<ref>M 하이켈하임, p.172. 146년 카르타고가 멸망한 직후, 로마 [[원로원]]은 틀림없이 이탈리아의 부유한 지주들이 활용할 용도로 [[마고]](Mago)가 카르타고의 농업에 관해서 쓴 32권의 고전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 마고의 저서는 로마인들으 보존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카르타고 문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저서가 후기 로마의 농업 관련 저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그 영향력은 중세 [[에스파냐]]의 [[무어인]]과 아마 에스파냐인에게도 간접적으로 전달되었다. 에스파냐인들은 [[신세계]]에서 노예 노동력을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을 뿌리내렸다.</ref>
<references/>
 
* {{서적 인용 |성= M.하이켈하임|이름= 프리츠|공저자= 세드릭 A. 요, 앨런 M. 워드 |제목= 로마사(A History of the roman people) |꺾쇄표= 예 |발행일자날짜= 10 |발행년도= 1999 |발행월= 3|출판사= 현대지성사 |출판위치= 서울 |id= ISBN 89-8347-011-9 |쪽= 60~61}}
 
== 같이 읽기 ==
== 바깥고리 ==
{{commons|Carthage}}
<!-- [[분류:고대 로마의 적]] -->
 
<!-- [[분류:고대 로마의 적]] -->
[[분류:카르타고| ]]
[[분류:튀니지의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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