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테만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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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2 = [[항공모함]] 1척,<br />경항공모함 3척,<br />전함 9척,<br />중순양함 14척,<br />경순양함 6척,<br />구축함 35척 이상,<br />항공기 300대 이상 <br/ >(함재기가 아닌 일반 군용기 포함)
|사상자1 = 사상자 2800명 이하,<br />경항공모함 1척,<br />호위항공모함 2척,<br />구축함 2척,<br />호위구축함 1척 침몰,<br />함재기 200대 이상 피격
|사상자2 = 사망자 12500명 이하,<br />항공모함 1척,<br />경항공모함 3척,<br />전함 3척,<br />순양함 10척,<br />구축함 11척 침몰,<br />함재기 300대 이하 피격<ref>{{서적 인용 |이름=Thomas |성씨=Evan |연도=2006. |제목=Sea of Thunder |출판위치=New York |출판사=Simon & Schuster. |쪽=322 |언어고리언어=en |ISBN=978-0-7432-5221-8}}</ref>
}}
{{전역상자 필리핀 1944-1945}}
'''레이테 만 전투'''({{llang|en|Battle of Leyte Gulf}})는 공식적으로 '''제2차 필리핀 해전'''로 알려져 있는 [[제 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큰 해전이며, 아마도 특정 부분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해전일 것이다.<ref name="Woodward1947">{{서적 인용 |제목=The Battle for Leyte Gulf |last=Woodward |first=C. Vann |authorlink= |coauthors= |year=1947 |publisher=Macmillan |언어고리언어=en |location=New York}}</ref>
 
[[필리핀]]의 [[레이테 섬]], [[사마르 섬]], [[루손 섬]]에서 1944년 10월 23~26일에 미해군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연합과 [[일본 제국 해군]] 사이에서 벌어졌다. 10월 20일 미군이 일본의 고립-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석유의 공급을 방해하기 위한-을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작전으로 [[레이테 섬 전투|레이테섬을 공격]]한다. 일본 제국 해군은 연합군에 대항하여 가능한 거의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방어에 나서지만, 미국 해군의 [[3 함대 (미국)|3 함대]]와 [[7 함대 (미국)|7 함대]]에 의하여 격퇴된다. 일본 제국 해군은 방어 작전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극심한 전력 손실로 인하여 이후 작전에 여려움을 격게 된다. 특히 살아남은 대형함들은 연료 부족으로 인하여 이후 [[태평양 전쟁]]기간 동안 거의 항에 묶여있게 된다.<ref name="Fuller1956">{{서적 인용 |제목=The Decisive Battles of the Western World |volume=III |last=Fuller |first=John F. C. |authorlink= |coauthors= | year=1956 |publisher=Eyre & Spottiswoode |location=London |isbn= |pages= |url= }}</ref><ref name="Morison1956">{{서적 인용 | chapter = Leyte, June 1944 – January 1945 |제목=[[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 |volume=XII |last=Morison | first =Samuel E. |authorlink= |coauthors= |year=1956 |publisher=Little & Brown |location=Boston |isbn= |pages= |url=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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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작전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니스트 킹]] 해군 대장과 다른 합동 참모부 수뇌부는 일본군을 필리핀에 묶어 높고 [[타이완]](당시 포르모자 공화국)을 공격하여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일본과 남아시아 사이의 병참선을 끊을 수 있기를 바랐다. 미육군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서기를 바랐다. 이는 필리핀이 일본의 또다른 병참선이기도 했으나, 개인적으로 1942년 필리핀 철수 당시 남긴 "나는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는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을 포함한 연합참모부 밖의 고급 지휘관들은 필리핀 주둔의 일본 항공 세력이 우회하기에 너무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니미츠와 맥아더는 초기에 레이테만 전투에 반대하였다. 니미츠는 타이완이 일본의 동남아시아 병참선 차단이나 미군의 중국 본토 전개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맥아더는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스벨트 대통령]]과 맥아더, 니미츠 사이의 회의에서 필리핀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목표임을 확인하였으나, 필리핀 공격에 대한 결정이 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ref>{{cite book | chapterurl=http://www.history.army.mil/books/70-7_21.htm| chapter= Chapter 21: Luzon Versus Formosa | last= Smith |first= Robert Ross | date= |month= | title = Command Decisions | url = http://www.history.army.mil/books/70-7_0.htm| publisher=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id = CMH Pub 70-7| year = 2000| origyear = 1960 | pages= | accessdate=8 December 2007 | archiveurl= http://web.archive.org/web/20071230145455/http://www.history.army.mil/books/70-7_0.htm| archivedate= 30 December 2007 <!--DASHBot-->| deadurl= no| quote= "Meeting with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 in a conference at Pearl Harbor in late July 1944,... MacArthur then argued persuasively that it was both necessary and proper to take Luzon before going on to Formosa, while Nimitz expounded a plan for striking straight across the western Pacific to Formosa, bypassing Luzon. Apparently, no decisions on strategy were reached at the Pearl Harbor conferences. The Formosa versus Luzon debate continued without let-up at the highest planning levels for over two months, and even the question of bypassing the Philippines entirely in favor of a direct move on Formosa again came up for serious discussion."}}</ref> 그러나 결과적으로 니미츠는 맥아더의 계획에 동의하게 된다.<ref name="Morison1956"/>
 
타이완에 상륙하기 위해서는 12개 사단 규모의 지상군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당시 미군은 태평양 전선에 추가적으로 투입할 병력이 부족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네델란드령 동인도의 솔로몬섬이나 다른 여러 태평양 지역의 섬을 담당하고 있어서 역시 가용한 병력이 부족하였다. 유럽 전선이 정리 되기 전까지 필요한 병력을 수급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ref name="Morison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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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미처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38 [[고속 항공모함 기동함대|기동함대]]를 주력으로 하는 [[윌리엄 홀시 주니어|윌리엄 홀시]] 해군 중장의 미군 3함대는 외각 지원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입장에서 전술적으로 거의 재앙에 이를뻔 했던 위기를 가져오는 지휘체계 혼선이 있었다. 당시 명령권을 가진 사령관에 미해군 제독은 한명도 없었으며, 7함대 사령관인 킨케이드 제독은 태평양 남서부 방면 연합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보고하였고, 3함대 사령관인 홀시 제독은 태평양 전구 총사령관이었던 니미츠에게 보고하게 된다.<ref name="Fuller1956"/><ref name="Morison1956"/>
 
그러나 일본측 역시 3개의 분할된 함대를 운용하며 통일된 명령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본 제국 해군 입장에서 미군의 선택은 명백해 보였다. [[연합 함대]] [[도요다 소에무]] 사령관은 4개의 작전을 준비한다. ''[[쇼호작전|쇼1호작전]]''(捷1号作戦, 쇼 이치고 사쿠센<ref>'捷'은 '이길 첩', 꽂을 삽'으로 읽으며, 이기다, 싸움에 이김, 빠르다, 전리품, 노획품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ref>)은 필리핀에서의 대규모 해상 작전이었으며, ''[[쇼호작전|쇼2호 작전]]'', ''[[쇼호작전|쇼3호 작전]]'', ''쇼4호 작전''은 각기 타이완(당시 포르모자 공화국)과 [[류큐 제도]]. [[쿠릴 열도]]에 대한 공격에 대비하는 작전이었다. 각 작전은 당시 일본의 절박한 연료 공급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공세 계획을 포함하고 있었다.
 
[[파일:Leyte map annotated.jpg|thumb|300px|레이테만 전투에서의 4개의 주요 작전: 1 [[레이테만 전투#시부얀 해전|시부얀 해전]] 2 [[레이테만 전투#수리가오 해협 전투|수리가오 해협 전투]] 3 [[레이테만 전투#엔가뇨 곳 해전|엔가뇨 곳 해전]] 4 [[레이테만 전투#사마르 해전|사마르 해전]]. Leyte Gulf is above 2 and to the left of 4. The island of Leyte is to the left of the gulf.]]
 
1944년 10월 12일, 홀시 제독의 미군 3함대는 [[레이테 전투|레이테 상륙작전]]에 일본군 항공 세력 지원을 방해하기 위하여 [[포르모자 공중전|타이완과 류큐 제도에 대한 잇따른 항공모함 강습]]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항하여 ''쇼2호 작전''을 발동하였으며, 미군 3함대 항공모함에 대한 다수의 공격 제대를 출격시켰다. 이는 "육상 발진 항공기 대 해상 발진 항공기의 전멸전(knock-down, drag-out fight between carrier-based and land-based air)"으로 일컬어지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일본군은 해당 지역 주둔의 전력 대부분에 해당하는 600기의 전투기를 3일 사이에 상실한다. 필리핀 근해로 이어지는 다음 미군의 공격에 대항하여 일본 해군은 ''첩 1호 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ref name="Fuller1956"/><ref name="Morison1956"/>
''쇼1호 작전''은 '북방군'으로 불린 일본 해군 소장 [[오자와 지사부로]]지휘의 전투함들이 미군 주력 함대를 레이테만 밖으로 유인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북방군은 수척의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지만, 항공기나 항공요원은 거의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항공모함이 미끼가 되어 미군 주력 함대를 이끌고 레이테만에서 빠져나가면, [[니시무라 쇼지]] 해군 소장과 [[시마 기요히데]] 해군 소장 지휘의 '남방군'이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하고, [[구리타 다케오]] 해군 소장 지휘의 '중부군'이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하여 [[레이테 만]] 서쪽으로부터 미군의 상륙부대를 타격하는 것이 작전 계획의 뼈대였다. 중부군은 당시 일본군의 중심 전력이었다. <ref name="Fuller1956"/><ref name="Morison1956"/>
이 작전은 적어도 1개 이상의 작전 단위-특히 미끼로 사용되는 북방군-에 대한 괴멸적 손해를 피할 수 없었지만, 도요다 사령관은 차후에 미군의 심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bquote|만일 필리핀 해역에서 패배하면, 함대가 살아남더라도 남쪽으로부터의 병참선이 차단되어 일본으로 귀항할 연료를 공급받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남쪽 해안에서 함대가 살아남더라도 본토에서부터 탄약과 무기의 공급이 차단될 것이 명백하였으므로, 함대를 남기고 필리핀을 상실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br />
Should we lose in the Philippines operations, even though the fleet should be left, the shipping lane to the south would be completely cut off so that the fleet, if it should come back to Japanese waters, could not obtain its fuel supply. If it should remain in southern waters, it could not receive supplies of ammunition and arms. There would be no sense in saving the fleet at the expense of the loss of the Philippines.|15px|15px|[http://www.ibiblio.org/hyperwar/AAF/USSBS/IJO/IJO-75.html 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Pacific) – 'Interrogations of Japanese Offic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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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나이]]에서 출항할 당시 구리타 제독 휘하의 중부군은 5척의 전함([[야마토함]], [[무사시함]], [[나가토함]], [[곤고함]], [[하루나 (전함)|하루나함]])과 10척의 중순양함([[아타고함]], [[마야함]], [[다카오함]], [[초카이함]], [[묘코함]], [[하구로함]], [[구마노함]], [[수주야함]], [[치쿠마함]]), 2척의 경순양함([[노시로함]], [[야하기함]]) 및 15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f name= "Morison1956"/>
 
구리타 함대는 10월 23일 자정 무렵에 [[팔라완 섬]] 주위를 통과하게 된다. 미해군 잠수함 다터(USS Darter)와 데이스(USS Dace)는 근처의 수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10월 23일 00:16에 다터함의 레이더가 27,000 m 거리에서 일본 함대를 탐지한다. 다터함 함장이 육안으로 접적을 확인하고 최소한 3회에 걸쳐 접적을 보고하는 사이에, 두 잠수함은 일본 함대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야마토함의 무선병은 최소한 한번 이상 해당 무전을 탐지하였지만, 구리타 제독은 적절한 대잠수함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 <ref name= "Morison1956"/>
 
다터함과 데이스함은 최대 출력으로 수상 기동하여 구리타 함대 진형의 진행 방향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일출과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공격은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 졌다. 05:24에 다터함은 6발의 어뢰를 발사하였으며, 적어도 4발이 구리타 함대의 기함인 중순양함 아타고(다카오급)에 명중한다. 10분후, 다터함은 다카오함에 두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05:56에 데이스함은 마야함(다카오급)에 네발의 어뢰를 명중시킨다.<ref name= "Morison1956"/>
 
아타고함과 마야함은 곧 침몰하였다.<ref name="TakaoClass">{{cite web|first = Hiroshi | last = Nishida |url= http://homepage2.nifty.com/nishidah/e/stc0332.htm |title= Hashimoto, Shintaro |year=2002 |work= Imperial Japanese Navy}}</ref> 다카오함은 두척의 구축함과 함께 브루나이로 회항하였으나, 다터함과 데이스함이 계속 추격하였다. 10월 24일에 다카오함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다터함은 모래톱에 좌초하였으며,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잠수함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터함의 승무원 전원은 데이스함에 구조된다.
 
다카오함은 싱가포르로 귀항하였다.
 
아타고함은 매우 빠르게 침몰하였으며, 구리타 제독도 직접 수영을 해야할 정도였다. 제독은 일본 구축함에 의해 구조되었으며, 야마토함에 옮겨타게 된다. <ref name= "Morison1956"/><ref name="Cutler1994">{{cite book |title=The Battle of Leyte Gulf, 23–26 October 1944 |last=Cutler |first=Thomas J. |authorlink= |coauthors= |year=1994 |publisher=HarperCollins |location=New York | isbn=0-06-016949-4 |pages= |url= }}</ref><ref name="Hornfischer2004">{{cite book| title=The Last Stand of the Tin Can Sailors |last= Hornfischer |first=James D. |authorlink= | coauthors= |year=2004 |publisher=Bantam |location=New York |isbn=0-553-80257-7 |pages= |url= }}</ref>
 
== 시부얀 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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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apanese battleship Musashi cropped.jpg|thumb|1944년 10월에 레이테만 전투를 위해 브루나이를 출발하는 무사시함]]
 
10월 24일 08:00에 중부군이 [[시부얀 해]]로 들어서는 것이 연합군에 발견되었으며, 홀시 제독의 3함대 소속의 엔터프라이즈함(USS Enterprise, CV-616)에서 발진한 VF-20 공격대의 F6F 핼켓 전투기와 VB-20 공격대의 SB2C-3 [[급강하폭격기]], VT-20 공격대의 TBF 어벤져 [[뇌격기]]가 공격을 개시하였다. 3함대의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전투함의 위치가 적절하지 않았다. 10월 22일에 홀시 제독은 2개의 함대전투단을 [[울리티 섬]](Ulithi)에 위치한 함대 기지로 이동하여 보급과 재무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잠수함 다터에서 접적 보고가 들어오자 홀시 제독은 데이비슨 제독의 함대전투단을 소환하였으나 38 [[고속 항공모함 기동함대|기동함대]]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있던 [[존 S. 멕케인]] 제독 휘하의 함대전투단은 울리티 섬으로 계속 항해하도록 놔두었다. 결국 10월 24일에 멕케인의 전투단도 소환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미해군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전투단은 이어진 전투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3함대 가용 항공전력의 40%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또한 멕케인 함대전투단에는 3함대에 배속된 6척의 중순양함 중 4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10월 24일 아침, 단 3개의 함대전투단만 구리타 함대에 대한 공격이 가능하였으며, 그나마도 구리타 함대 공격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던 [[제라드 F. 보겐]](Gerald F. Bogan) 제독 휘하의 38 기동함대 2 함대전투단(TG 38.2)은 1척의 정규항모(인트레피드함, USS Intrepid, CV-11)와 2척의 경항모로 이루어진 가장 약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ref name="Morison1956"/>
 
[[파일:Yamato hit by bomb.jpg|left|thumb|시부얀 해에서 1944년 10월 24일에 전방 포대 근처에 폭탄을 맞은 [[야마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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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겐 함대전투단 소속의 인트레피드함과 카봇함(USS Cabot, CVL-28)에서 이륙한 항공기들은 10:30 무렵에 공격을 시작하였으며, 나가토함, 야마토함, 무사시함에 명중탄을 날리고 중순양함 묘코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인트레피드함과 에섹스함(USS Essex, CV-9), 렉싱턴함(USS Lexington, CV-16)에서 이륙한 2차 공격제대는 에섹스함 소속의 VB-15 헬다이버와 VF-15 헬켓이 주축이 되어 무사시함에 10발을 명중시켰다. 무사시함이 철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엔터프라이즈함과 프랭클린함(USS Franklin, CV-13)에서 발진한 3차 공격제대는 추가적으로 11발의 폭탄과 8발의 어뢰를 명중시킨다.<ref name="Morison1956"/>
 
구리타는 항공모함 작전거리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함대의 침로를 바꾸었으며, 피해입은 무사시함을 지나게 된다. 구리타는 17:15에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향한 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무사시함이 응급복구하기를 기다렸으나, 무사시함은 적어도 17발의 폭격과 19발의 어뢰에 피격되어 전복하고 19:30분에 침몰하였다. <ref name="Morison1956"/>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루손 섬]]에서 휘하의 항공기로 3개의 공격제대를 구성하여 셔먼 제독 휘하의 38 기동함대 3 함대전투단(TG 38.3)에 공격을 가하였다. TG 38.3은 루손 섬 비행장을 폭격하여 일본의 육상 발진 항공기가 [[레이테 만]]에 접근하는 연합군 함정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오니시 중장의 각 공격제대는 50~60기의 항공기로 구성되어 있었다.<ref name="Morison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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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SS Princeton (CVL-23) 1944 10 24 1523explosion.jpg|thumb|폭발하는 프린스턴함(USS Princeton, CVL-23)]]
 
대부분의 일본 공격기들은 셔먼제독의 전투초계비행중인 [[헬켓 전투기]]에 의하여 요격되거나 항로를 이탈하였다. 특히 데이비드 맥켐벨(David McCampbell) 비행대장(commander)의 지휘하에 에섹스함에서 출격한 두개의 전투기 분대가 좋은 성과를 보였다. 맥켐벨 비행대장 자신도 해당 작전에서 9기의 적기를 격추하였다. 그러나 한기의 일본 폭격기(요코수카 D4Y3, ''주디Judy'')가 방어선을 뚫고 09:08에 경항모 프린스턴(USS Princeton)을 550 &nbsp;lb(250 &nbsp;kg)급 [[철갑탄]]으로 명중시켰다. 폭발로 인해 프린스턴함 격납고에 큰 불이 났으나, 살수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화재는 빠르게 번졌으며, 2차 폭발이 계속 되었다. 화재가 진압되는 것 처럼 보였지만, 15:23에 함의 폭탄 저장소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폭발이 발생하였으며, 프린스턴함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이 폭발로 인해 화재 진압을 돕기 위하여 프린스턴함에 접근하던 경항모 버밍햄(USS Birmingham, CL-62)에서도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다.(233 사망, 426 부상) 버밍햄함도 매우 심하게 피해를 입어서 차후에 퇴역하게 된다. 해당 폭발은 다른 한척의 경항모와 두척의 구축함에도 피해를 입혔다. 프린스턴함을 구조하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17:50에 생존자를 철수신킨 후 경순양함 레노(USS Reno)에서 어뢰를 발사하여 자침하게된다.<ref name="Morison1956"/> 프린스턴함 승무원중 108명이 사망하였으며, 1,361명이 구조되었다. 프린스턴함은 레이테만 전투에서 미국이 상실한 가장 큰 전투함이었다.
 
10월 24일 3함대는 일본 중부군에 대하여 259회의 비행 출격을 감행하였으며, 대부분은 핼켓 전투기였다. 그러나 10월 25일 훨씬 약한 전력을 가지고 있던 북방군의 오자와 함대에 대한 527회 출격에 비하면, 구리타 함대를 무력화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공격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공격은 전함 무사시에 집중되었다. 결과적으로 무사시함은 침몰하였으며, 순양함 묘코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구리타 함대의 다른 전투함들은 대부분 전력을 보존하고 있었다.<ref name="Morison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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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시 제독은 북방군이 일본군의 주력이고, 일본군의 항공모함 전력을 괴멸시킬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반면에 중부군은 시부얀 해전 과정에서 무력화되고 퇴각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니미츠와 킨케이드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bquote|공격 보고서에 따르면 중부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br />3개 그룹과 북쪽으로 진행하여 새벽에 교전하겠다.|15px|15px|Morison (1956)}}
 
3개 그룹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홀시와 니미츠는 서로 다르게 판단하였다. 니미츠 제독은 홀시 제독이 새로이 편성된 34 기동함대를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 방어를 위하여 놔두고, 남은 3개 그룹의 함대전투단과 함께 북방군을 추격한다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실제로 홀시 제독 해당 해역의 가능한 모든 전투함을 동원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에는 방어 병력이 남지 않게 되었으며, 3함대는 좌익을 무방비로 노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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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urigao straight.jpg|right|thumbnail|250px|수리가오 해협 전투]]
 
[[니시무라 쇼지]] 중장이 이끄는 "남방군" 니시무라 함대는 전함 ''야마시로''(山城)를 기함으로 하여 전함 ''후소''(扶桑), 중순양함 ''모가미''(最上), 구축함 ''시구레''(時雨), ''미치시오''(滿潮), ''아사구모''(朝雲), ''야마구모''(山雲)의 일곱 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f name="Morison1956"/> 그러나 니시무라 함대의 실태는 사실상 다른 함대를 편성하고 남은 배를 긁어모아 만든 함대였다. ''후소''와 ''야마시로''는 선령이 25년이 넘은 노후 함정들로 설계상의 결함 탓에 실전 경험이 거의 없이 주로 일본 국내에서 훈련, 교습용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모가미''는 항공순양함으로 개조는 했으나 성능상 문제로 인해 원 소속인 제7전대가 제8전대와 통폐합될 때 제외되어 제2함대 부속함으로 남아 있었다. ''시구레''는 소속 부대인 제27구축대의 다른 배들이 모두 격침<ref>''하루사메''(春雨)가 1944년 6월 8일, ''시라쓰유''(白露)가 15일, 그리고 ''사미다레''(五月雨)가 8월 26일에 각각 격침되었다.</ref> 되고 혼자 남은 상태였으며, 나머지 세 구축함은 동형함으로 제4구축대라는 단일 부대 소속이었으나 각자 다른 부대를 전전하다가 제각각 편입되어<ref>''야마구모''가 1943년 9월 15일, ''미치시오''가 1944년 3월 31일, ''아사구모''가 1944년 7월 10일에 각각 편입</ref> 한 부대로써의 훈련이나 실전 경험이 거의 없었다.<ref>당시 제4구축대는 이 세 척 외에 카게로급 구축함인 ''노와키''(野分)가 소속되어 있었으나 ''노와키''는 구리타 함대에 배치되었다. 아울러 ''노와키''도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에서 미국측의 집중 공격을 받고 격침되어 제4구축대는 레이테 만 전투로 섬멸되었다.</ref>
 
니시무라 함대는 10월 22일 15:00에 구리타 함대의 뒤를 이어 [[브루나이]]를 출발하였으며, [[술루 해]]를 향해 동진하다 [[네그로스 섬]]을 지나 북동쪽으로 항로를 틀어 [[민다나오 해]]에 들어섰다. 이어 [[민다나오 섬]]을 [[우현]]에 두고 북동진하여 [[수리가오 해협]]의 남쪽 입구로 들어섰다. 니시무라 함대는 해협을 통과하여 [[레이테 만]]에서 구리타 함대와 합류하고자 하였다.
 
니시무라 함대를 뒤따라 이동한 [[시마 기요히데]] 중장이 지휘하는 "2차 공격대" 시마 함대는 기함인 중순양함 ''나치''(那智)를 위시하여 중순양함 ''아시가라''(足柄), 경순양함 ''아부쿠마''(阿武畏), 구축함 ''아케보노''(曙), ''우시오''(潮), ''가스미''(霞), ''시라누이''(不知火), ''와카바''(若葉), ''하쓰하루''(初春), ''하쓰시모''(初霜)의 열 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니시무라 함대는 10월 24일에 미해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피해는 경미하였다.
 
중부군(구리타 함대)과 남방군(니시무라, 시마 함대)에 내려진 엄격한 무선침묵 때문에 니시무라 함대는 시마 함대나 구리타 함대와 보조를 맞추기 어려웠다. 02:00에 니시무라 함대가 수리가오 해협에 진입하기 시작한 시점에, 시마 함대는 25 [[해리]](46 &nbsp;km) 뒤처져 있었으며, 구리타 함대는 북서쪽으로 수시간 거리의 [[시부얀 해]]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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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로''와 ''모가미''는 미국 전함의 16인치 함포와 14인치 함포에서 발사된 다수의 철갑탄 외에도 미국 구축함의 공격으로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시구레''는 뱃머리를 돌려 퇴각하고자 하였으나 조향력을 잃고 완전 정지하였다. ''야마시로''는 함대 사령관인 니시무라 중장, 함장인 시노다 가쓰키요({{lang|ja|篠田勝清}}) 대령 등과 함께 04:20에 침몰하였으며, ''모가미''와 ''시구레''는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남방군의 후위를 담당하는 시마 함대는 타이완의 마코 해군기지(Mako Guard District)에서 출발하여 도중인 10월 24일 [[술루 해]]에서 미국 측의 공격을 받아 ''와카바''가 격침되고 아홉 척이 되어 니시무라 함대의 후방 35 해리(64 &nbsp;km)에서 수리가오 해협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마 함대의 레이더는 다수의 섬에서 나타나는 난반사에 의하여 거의 무용지물이였으며, 특히 어뢰정과 같은 작은 함정은 거의 탐지하지 못하였다.<ref>Tully (2009), p. 167.</ref> 결국 경순양함 ''아부쿠마''가 미국 어뢰정 PT-137이 쏜 어뢰를 맞고 낙오했다. 여덟 척으로 줄어든 시마 함대는 퇴각중인 니시무라 함대의 잔존 병력과 마주친다. 전함 ''후소''의 두동강난 잔해를 본 시마 중장은 니시무라 함대에 소속된 두 전함이 모두 침몰한 것으로 판단하고 함대에 후퇴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후퇴 과정에서 함대 기함인 중순양함 ''나치''가 8노트의 저속으로 퇴각중이던 니시무라 함대의 중순양함 ''모가미''를 정지해 있는 것으로 오인, 접근하다 충돌하여 ''모가미''의 조타실이 침수된다. 시마 중장은 낙오한 ''아부쿠마''와 크게 손상된 ''모가미''에게 구축함 ''우시오''와 구축함 ''아케보노''를 각각 호위함으로 파견하여 퇴각시키려 했으나 미국측의 공습을 받아 ''모가미''는 최종적으로 생존 승무원을 ''아케보노''로 옮겨태우고 자침시키기에 이르고, ''아부쿠마'' 역시 미국측의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한편 뱃머리 부분이 손상되어 표류하던 ''아사구모''는 ''모가미''와 ''시구레''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쳐져 있다가 미국측 공격으로 침몰했다. 이로써 니시무라 함대 소속 일곱 척의 전투함 중 ''시구레''만이 살아남아 수리가오 해협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ref>''시구레''는 "呉の雪風、佐世保の時雨"{{해석|구레의 유키카제, 사세보의 시구레}}라고 칭해질 정도로 구레 진수부 소속의 구축함 ''유키카제''와 함께 전투에서의 생존률이 높은 배였다. 그러나 이 ''시구레''도 약 3개월 뒤인 1945년 1월 24일, 말레이반도 근처에서 미 해군 잠수함 ''블랙핀''(USS Blackfin, SS-322)에게 격침되어 37명의 전사자가 발생한다.</ref> 한편 시마 함대의 전투함은 열 척 중 24일 격침된 ''와카바'', 25일 낙오 후 26일 격침된 ''아부쿠마''를 제외한 여덟 척이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살아남았으나, 이후에 레이테만에서 대부분 격침된다.<ref name="Morison1956"/><ref name="Howard1999"/>
 
수리가오 해협 전투는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쟁에서 이루어진 두 번의 '전함 대 전함' 전투 중 하나이며,<ref>다른 하나는 과다카날 전역 중에 이루어진 [[과다카날 해전]]</ref> 역사상 마지막 '전함 대 전함' 전투이다. 또한 역사상 마지막으로 ''[[정자전법]](Crossing the T)''이 사용된 전투였다. 그러나 수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정자전법이 사용된 시점은 이미 일본군 함대가 세 척의 전투함만 남아있는 약화된 상태였으므로, 전투의 결과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ref name="Morison1956"/><ref name="Howard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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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의 북방군에 남아 있는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하여 3함대의 가용 전력 전부를 북진하도록 명령한 홀시 제독의 결정은 결국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이 전혀 방비되지 않은 상태로 놔두게 되었다.
 
킨케이드 제독과 참모를 포함한 7함대의 지휘관들은 홀시 제독이 34 기동함대(TF 34)을 산베르다르디노 해협을 지키도록 하고 남은 3척의 항공모함을 지휘하여 북진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실제로는 6척의 전함을 포함한 3함대의 가용한 전력 전부가 북진하고 있었다.
 
결국 구리타의 중부군은 방해받지 않고 10월 25일 03:00에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에 나타나 [[사마르섬]]을 끼고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는 미해군은 7함대 소속의 [[호위항공모함]](호출부호 '테피(Taffy)' 1, 2, 3) 3척을 포함한 16척의 작고 매우 느리며 비무장인 호휘항공모함과 경무장이거나 비무장인 구축함 혹은 더 소형인 [[호위구축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팔라완 통로와 시부얀 해전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의 중부군은 [[야마토]]함을 포함한 4척의 전함과 6척의 중순양함, 2척의 경순양함 및 11척의 구축함을 포함하는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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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타 함대는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제독 휘하의 전투단 77.4.3 (Task Unit 77.4.3, 'Taffy 3')를 부지불식간에 따라잡았다. 스프레이그 제독은 휘하의 항모들에 함제기를 발진시키라고 명력하였으며, [[스콜]]에 숨기 위하여 동쪽으로 항진하였다. 구축함과 호위구축함들은 연막을 이용하여 항공모함의 후퇴를 가리고자 하였다.
 
구리타 제독은 오자와 함대의 유인 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홀시 제독의 3함대 소속 항공모함을 찾았다고 판단하고, 대 항공모함 전투 대형으로 함대를 제편하였다. 또한 '일반 공격' 명령을 통하여 휘하의 함대가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공격하도록 하였다. <ref name="Thomas2006">{{cite book |title=Sea of Thunder: Four Commanders and the last Great Naval Campaign, 1941–1945 |last= Thomas |first=Evan| authorlink= |coauthors= |year=2006 |publisher=Simon & Schuster |location=New York |isbn=0-7432-5221-7 |pages= |url= }}</ref>
미해군 구축함 [[USS 존스턴|존스턴]](USS Johnston, DD-557)은 적 함대에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함장 어네스트 에반스(Ernest E. Evans) 소령은 적 함대와의 압도적인 전력차를 확인 하고 전속력으로 적 함대로 뛰어들며 중순양함 구마노(Jumano)를 어뢰로 공격하였다. 구마노함은 피격되어 전열에서 이탈한다. 이를 목격한 스프레이그 제독은 남은 전투단 소속의 소형 함정에 같은 역할을 명령한다. Taffy 3 소속의 다른 두척의 구축함([[USS 호엘|호엘]](USS Hoel, DD-522),[[USS 허만|허만]](USS Heermann, DD-532))과 호위구축함(사무엘 로버트(USS Samuel B. Roberts, DE-413))은 자살적 공격을 감행한다. 일본 함대는 화력이 분산되고, 공격하는 어뢰를 회피하기 위하여 함대의 대형이 흐트러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함대는 항공모함에 계속 접근하며 호엘함과 로버트함을 침몰시킨다. 존스턴함 역시 보유한 어뢰를 모두 소모하고 5인치 주포로 계속 교전하였으나, 일본 구축함에 의해 침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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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USS St Lo (CVE-63) 2.jpg|thumb|''[[가미카제]]'' 공격으로 폭발 중인 세인트로.]]
 
스프라구 함대의 격렬한 반격 때문에 일본 측은 교전 상대가 미해군 주력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구리타 함대 기함이었던 야마토를 비롯하여 여러 함들이 항공 공격과 어뢰에 대한 회피 기동 과정에서 전투에서 이탈하거나 전열이 흐트러지게 된다. 구리타 제독은 모든 함들에 대하여 야마토함이 북진하고 있음을 알리고 함열을 재정비하고자 노력하였다. 레이테만으로 전체 함대의 방향을 돌리기 직전에 구리타는 미해군 항공모함 전단이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수송함보다 전투함과 교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북쪽에 있다던 미해군 항공모함 전단에 대한 보고는 잘못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구리타 함대는 산베르다르디노 해협을 통해 후퇴하기로 한다. 이상의 전투 과정에서 구리타 제독은 3척의 중순양함을 잃었으며, 더이상의 교전이 지속되면 손실이 확대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더구나, 후퇴를 결정한 시점에서 구리타 제독의 판단은 오자와 함대가 미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미해군의 실질 전력 대부분을 레이테만 밖으로 끌어내었다는 사실을 모른체 이루어 졌다. 일본 함대 사이의 불충분한 의사 소통과 항공 정찰 정보의 부족 때문에 구리타 제독은 작전 계획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을 알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리타는 레이테만에 남은 미해군 상륙전력에 대한 공격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레이테만에 남은 미해군 상륙전력은 수상함과 교전할 만한 전력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했다. 구리타 제독은 자신이 미해군 3함대의 주전력과 교전한다고 생각했으며, 곧 포위섬멸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ref name="Thomas2006"/>
 
구리타 함대의 남은 전투함은 대부분 탈출에 성공하였다. 뒤늦게 전황을 파악하고 상륙전력을 구출하기 위하여 회항한 홀시 제독의 3함대는 구리타 함대를 놓치게 된다. 나가토함, 하루나함, 공고함은 Taffy 3 전투단의 호위항모에서 발진한 항공전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구리타 함대는 5척의 전함으로 전투를 시작하였으나, 종료 시점에서 전투 가능한 전함은 야마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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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08:00를 막 지나서 [[레이테만 전투#수리가오 해협 전투 10월 25일|수리가오 해협]]에서 니시무리 제독의 남방군과 교전하는 7함대로부터 급박한 무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킨케이드 제독의 발신 중 하다는 다음과 같다. "위기임. 고속 전함과 항공기로 적이 레이테 만에 진입하거나 CVE를 공격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것 같음" 차후에 홀시 제독은 이 무전에 크게 당황했다고 말했다. 홀시 제독은 최소한 10:00 무렵까지 킨케이드 제독의 중요한 무전을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홀시 제독은 킨케이드 제독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킨케이드 제독이 보낸 무전의 내용 중 심각한 것 가운데 하나는 7함대 전함의 포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내용도 홀시 제독이 7함대를 돕기 위한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다.<ref name="Woodward1947"/><ref name= "Fuller1956"/><ref name="Morison1956"/> 또한, 7함대의 실제 탄약 보유량은 부족하지 않았다.<ref name="Morison1956"/>
 
결국 7함대로 부터의 첫 구조 요청 이후 세 시간도 더 지나서야 홀시 제독은 34 기동함대의 진로를 바꾸어 사마르섬으로 남진하도록 하였다. 이 시점에서 리 제독의 함대는 오자와 함대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또 34함대는 급유하는데 2시간 반을 사용한다.<ref name= "Morison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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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에 34 기동함대의 항로를 남쪽으로 바꾸며, 홀시 제독은 4척의 순양함과 9척의 구축함으로 38 기동함대를 편성하고 드보즈 제독(Rear Admiral DuBose)에게 지휘를 맡겼다. 14:15에 미처 제독은 드보즈 제독에게 남방군의 잔존 병력을 소탕할 것을 명령했다. 드보즈 함대는 경순양함 치요다를 17:00에 격침하고 20:59에는 치열한 교전 끝에 구축함 하츠즈키를 격침한다.<ref name="Morison1956"/>
 
오자와 제독은 드보즈 함대의 빈약한 구성을 알게 되자, 전함 이세와 휴가의 침로를 남쪽으로 바꾸어 드보즈 함대를 격파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드보즈 함대를 찾지 못하여 실패한다.
 
홀시 제독은 6적의 전함 모두를 7함대에 함류하도록 하여 반격 받게될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23:10에 미해군 잠수함 욜라오(USS Jallao, SS-368)가 오자와 함대의 경순양함 타마를 어뢰로 격침시킨다. 이것은 차후에 있었던 몇차례의 항공 교전을 제외하면, 수상함에 의하여 이루어진 레이테만 전투의 마지막 교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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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만 전투의 결과로 레이테섬에서 미육군 6군단의 [[교두보]]가 바다로 부터의 적의 공격에 안전해진다. 그러나 연합군은 레이테섬의 완전 점령을 위하여 1944년 12월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전투를 진행해야 했다. 이후 [[레이테 전투]]는 섬에서의 지상전 뿐 아니라 일본 제국군의 보급과 보충의 저지하고, 해상-공중 우세를 확보하기 위한 여러번의 추가적인 상륙 작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추가적인 상륙작전은 [[오막 해 전투]](Battle of Ormoc Bay]]로 통칭된다.<ref name="Morison1956"/>
 
일본 제국 해군은 수상함 세력이 승조원에 매우 큰 손실을 입는다. 또한 연합군의 레이테섬 상륙을 저지하지 못했으므로, 필리핀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축소된다. 특히 일본은 전투함과 비행기의 연료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공급 받았고, 포탄과 같은 군수품의 기초 자원의 공급도 제한되므로, 전쟁수행능력에 크게 타격을 받게 된다. 또한, 제국군의 레이테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은 1945년에 연합군에 의한 [[류큐 제도]]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ref name="Fuller1956"/><ref name= "Morison1956"/>
 
레이테만 전투 결과 일본 제국 해군은 대부분의 전투력을 손실하게 된다. 결국, 레이테만 전투와 1945년 일본 패망 사이에 일본 제국 해군에 의하여 수행된 대규모 전투는 [[텐고쿠 작전]] 하나 뿐이 었으며, 그나마도 텐고쿠 작전은 자살 공격 임무였고, 결과적으로 야마토함과 남은 호위함들이 미해군 항공 세력에 의하여 파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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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해군의 중순양함 오스트레일리아가 10월 21일에 가미카제에 피격된 것이 첫 번째 가미카제 공격이었으며. "특수 공격대"에 의하여 이루어진 조직적인 가미카제 공격에 의하여 사마르해 전투가 끝날 무렵인 10월 25일에 호위항모 세인트로가 격침된다.
 
전투가 끝난 후 한달이 지나서, 미해군은 대중에게 레이테만 전투가 홀시 제독의 작전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선전하였지만, 수년 후에는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무방비로 열어둔 홀시 제독의 오판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ref>[http://books.google.com/books?id=h98DAAAAMBAJ&pg=PA17 "The Battle That Won the Pacific."] ''Popular Mechanics'', February 1945, pp. 17–25</ref>
 
== 기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