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요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동일 항목 일본어 위키 번역
38번째 줄:
[[1773년]] [[11월 18일]]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차남으로 [[에도 성]]에서 태어났다. 맏형인 다케치요(竹千代)가 요절했기 때문에 장군 후계자가 되어 [[1837년]]([[덴포]] 8년)에 45세에 장군직을 물려받았지만, 이에나리가 중진으로 강력한 발언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1841년]], 이에나리의 사후 이에요시는 넷째 아들 이에사다를 장군 후계자로 정했다. 또한 노중 수좌의 미즈노 다다쿠니를 중용하고 이에나리파를 숙청하고 천보의 개혁을 진행시켰다. 다다쿠니는 막부 재정 재건에 나서 여러 개혁을 진행하였고, 철저한 사치 단속과 긴축 재정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세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한 언론 통제도 행하며, [[타카노 초오에]]와 [[와타나베 카잔]] 등의 개혁파 학자를 탄압했다. (만사의 옥)
 
[[1843년]](덴천보[[덴포]] 14년) 막부가 [[에도]], [[오사카]] 주변의 [[다이묘]], [[하타모토]] 영지를 막부 직할 영지로 편입하려고 상부의 지령을 발령하자 맹렬한 반발을 사서 이에요시의 판단으로 이듬해 철회를 하면서, 다다쿠니는 실각하고 덴포의 개혁은 좌절되었다. (이후 다다쿠니를 노중에 재임했다).
 
그 후, 이에요시는 [[도이 도시스라]], [[아베 마사히로]], [[스쯔이 마사노리]] 등에게 정치를 맡기고 요시나가 붕당 사건에 개입해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오키]]를 은거시키고, [[미토 번]]의 영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에 은거, 근신을 명령했다. 또한 나리오키의 일곱째 아들 시치로마에게 히토쓰바시 가문을 상속시켰다. ([[도쿠가와 요시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