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민항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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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1929년]]에 [[신용욱]]이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함으로써 태동하였다. 이후 조선비행학교는 [[1936년]] [[10월]]에 조선항공사업사로 바꾸면서 정기운항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 조선항공사업사는 미군정의 허가를 받아 [[1946년]] [[3월 1일]] 대한국민항공사({{llang|en|Korea National Airlines}})([[1948년]] 10월까지는 대한국제항공사)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재개하였다.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신용욱은 대한국제항공사의 명칭을 대한국민항공사(KNA. Korean National Airlines)로 바꾸고 사장으로 복귀했다. 이 때 신용욱은 자금이 없어 서울에서 한성상회의 이응직 사장에게 돈을 빌려 사업자금을 확충한다. 자금을 확충한 신용욱 사장은 미국 스틴슨(Stinson)사의 인기모델이었던 스테이션왜건(Station Wagon) 3대를 발주했다.10월
9.28 수복과 함께 서울에 돌아온 KNA 신용욱 사장은 타이완의 CAT(Civil Air Transport.중국민항공운공사) 소속 DC-3 쌍발여객기 2대를 임차하여 미군 장병들을 수송하면서 KNA재건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그 와중에도 비행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1953년 비행시간 3천 시간을 돌파해 미국 민간항공연맹으로부터 무사고 비행기록 표창을 받은 최초의 동양인이 되었다. 1956년에는 한미항공협정 체결을 성사시켜 미국 보잉사로부터 1백만 달러의 차관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3대 민의원에도 당선되었다. 1958년 2월 16일 KNA 소속 여객기 창랑호가 북한 간첩들에 의해 납북되어 큰 재정 손실을 입은 데다 속초에서 여객기가 불시착하는 등 사고가 이어지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벌어진 4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은 홍순희에게 패배했고, 1960년 5대 총선에서도 낙마함으로써 정치적 기반까지 잃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그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1962년 검찰이 부정축재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DC-4기를 구입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받은 100만 달러 가운데 30만 달러를 횡령하고, 이 비행기가 외국에 취항했을 때 홍콩에 있던 아들과 함께 밀수를 했다가 공항주재 기관원에게 발각되었지만 고위층의 압력으로 수사를 중단시켰으며, 밀수로 번 외화 20만 달러를 미국은행에 예금하여 국내재산을 불법 도피시키고, 시흥에 호화별장을 구입해 월간 6백만 환 이상을 낭비했다는 혐의였다.
1961년 5월부터 출범한 군사정권은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우면서 재차 그를 압박했다. 그해 8월 25일 그는 종로1가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타고 귀가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 26일 여의도비행장 입구에 있는 한강 샛강 둑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신용욱 사장이 자살하자 2대 주주인 한성상회 이응직 사장이 항공사 인수를 추진했으나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출자하여 인수하면서 [[대한항공공사]]를 설립하였다.
== 보유 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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