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이제 묘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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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덕사'''( 至德祠)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4동]]에 있는 [[조선]]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의 큰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의 사당과 묘소로 정식 명칭은 지덕사부묘소(至德祠附墓所)이다.
 
묘역은 11,888평에 사당 건평 9평을 비롯한 3동의 건물과 묘 1기를 포함해 [[1972년]] [[8월 30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재단법인 지덕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 전해오는 이야기 ==
지덕(至德)이란 [[중국]] 주(周)나라 때 태왕(太王)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우중을 건너뛰어 셋째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할 때 태백과 우중 두 형제는 부왕의 뜻을 헤아려 삭발하고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했다.
 
훗날 공자(孔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양녕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지덕사(至德祠), [[효령대군]]을 모시는 사당을 [[청권사]](淸權祠)라 하였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81153|제목=세종대왕의 '형님'으로 세상 살아가기|작성자=이정근|작성일자날짜=2005-09-18|출판사=오마이뉴스|언어=한국어|확인일자=2012-11-30}}</ref>
 
사당의 후면에 [[양녕대군]]과 정경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를 합장한 묘소가 자리하며, 그 앞에 장명등과 묘비 및 문인석이 좌우에 2기씩 서 있는데 [[양녕대군]]은 유언으로 호화로운 예장을 받지 말고 묘비와 상석을 만들지 말라 했는데 7대손 만(曼)과 8대손 성항(性恒)이 묘소 앞에 석물을 세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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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때 세운 묘비는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벼락소리와 함께 갈라져 [[1915년]] 다시 묘비를 세웠다고 전해온다. 또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승만]]이 남산 서쪽의 도동(桃洞)에 정착할 때, [[양녕대군]]의 봉사손으로 판서를 지낸 이근수의 도동 서당에 다니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거기에는 [[양녕대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지덕사(至德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살던 초가집이 도동 우수현(雩守峴)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승만]]은 그의 아호를 우남(雩南)으로 했다.
 
[[양녕대군]]은 시와 글씨에 능하였는데 [[서울역]]앞 [[남대문]]의 '[[숭례문]](崇禮門)'이라는 현판 글씨도 썼다.
 
능고개는 [[관악구]] [[봉천동]] 호리목 마을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이 고개를 넘어가면 상도동 산65-42번지와 217-1번지에 양녕대군의 묘소와 사당인 지덕사(至德祠)가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인데 사당에는 [[조선 세조|세조]]가 친히 만든 금자현액(金字懸額)과 [[조선]] 중기의 문신인 허목(許穆)의 휘호로 된 지덕사기(至德祠記), [[양녕대군]]의 필적으로 전해지는 숭례문의 탁본 등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