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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2월 제1기 장학생 12명을 뽑은 학원장학회는 1985년 김익달이 별세한 후에도 큰아들인 김영수 씨가 유지를 받들어 장학사업을 계속 이어오다, 2005년 밀알장학재단과 통합하여 현재의 '''학원밀알장학재단'''(學園밀알奬學財團)에 이르고 있다. 밀알장학재단은 학원장학생 출신들이 '김익달 선생의 숭고한 은덕을 미약하나마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1997년 설립한 재단이다.
 
==== 전후 문단의 텃밭을 일군 학원문학상 ====
우리 문단의 중추를 이루는 문인들 중에는 '학원세대'로 불리는 '''학원파 문인'''이 있다. 이는 '''학원문학상'''(學園文學賞)을 통해 등단한 문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이야 문인들의 등단 창구가 다양해져서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영향력 있는 등단 제도가 실제적으로 없지만, 1950년대 문단을 주도했던 것은 《학원》이었고, 그 시대 문학도들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었던 학원문학상 제도는 한 세대를 만들어낼 정도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학원》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당시 문화계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학원》은 당시 우리 문화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학원》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보면 박목월, 조병화, 김용호, 이원수, 정비석, 마해송, 여석기, 김용환, 김동진 등으로 현재 문화계의 원로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필진이 참여해서 만드는 잡지에서 뽑는 학원문학상은 명실공히 문단의 밑거름 구실을 해 낼 수 있었다.
 
1954년 1월 호에 첫 번째 학원문학상을 발표했는데, 이때 응모작이 2천여 통을 넘어 심사위원들이 일 주일이나 걸려 심사를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심사위원으로는 서정주, 장만영, 김용호, 조지훈, 조병화 씨 등이 참여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학원문학상 제도는 1967년 11회까지 계속되면서 유경환, 이제하, 황동규, 정공채 씨 등 시인 84명, 송기숙, 유현종, 이청준, 김주영, 김원일, 최인호, 황석영 씨 등 소설가 44명을 비롯하여 기타 평론, 아동문학, 희곡 부문에서 20여 명을 배출해 냈다.
 
그런데 《학원》에는 문학에 소질이 있는 청소년들을 위한 학원문학상 제도보다 일반 독자들에게 더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해 주는‘학원 문단’이 있었다. 매호 실리는‘학원문단’은 그야말로 청소년들의 필담의 장소였다. 학원파 문인의 한 사람인 시인 김광규 씨는 "독자들의 투고를 뽑아 실어 주었던‘학원 문단’은 전국의 문학소년 소녀들 사이에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달에는 어디 사는 누구의 글이 뽑혔나 하는 것이 커다란 화제였다."고 회고한다.
 
또한 시인 이성부 씨도 "'학원문단'은 내가 문학에 눈뜰 무렵의 최초의 스승이었다. 아울러 문학적 열정을 불러일으켜 준 가장 큰 자극제이기도 했다. 중학교 2, 3학년 때부터 '다음에 크면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도 '학원 문단'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전후 어려운 시절에 10대의 꿈을 키웠던 학원 세대들에게 《학원》은 영원한 청춘이며, 그 세대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특권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