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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소년기 ===
==== 소년기 ====
김익달은 [[1916년]] [[5월 9일]] [[경상북도]] [[상주시|상주군]] [[화서면]] 중문리에서 김응원을 아버지로, 김안동을 어머니로 하여 4남 3녀 중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빈농의 집안이었던 탓에 어려서부터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이때부터 몸에 밴 검소한 생활 태도는 그의 일생 동안 나타난 근검ㆍ절약의 생활 철학으로 발전한다. [[일제강점기|일제 치하]] 농촌의 생활, 그것도 빈농의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야 했지만 늘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생활 태도를 가진 소년이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마음먹은 일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꼭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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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김익달에게 생활고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그는 어린 마음에도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스스로 힘을 길러 자립하는 길이며, 그것은 곧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인들에게 이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청년기와 일본 유학 ====
보통학교를 마친 소년 김익달은 자립하는 방법으로 [[일본]]행을 결심한다.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계기가 되는 [[일본]]행은 그의 졸업반 담임선생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을 이기는 길은 곧 [[일본]]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라는 가르침이 소년 김익달의 마음속 깊이 새겨졌던 것이다. [[부산항]]에서 [[부관연락선|관부연락선]]에 오른 소년 김익달은 '주먹을 불끈 쥐고 꼭 성공해야만 돌아오겠다.'고 울부짖으며 떠났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생활은 본격적인 '고학'이라는 더욱 큰 시련으로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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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달의 첫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20세의 나이에 맛본 쓰라린 경험이었다.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청년 김익달은 운명에 굴하지 않았다. 오랜 고향 친구의 권유로 [[만주]]행을 결심한 김익달은 또 다른 운명을 향해 일어섰다. 당시 만주는 [[중국인]]을 비롯, [[한국인]], [[일본인]], [[소련인]], 서양인들이 모여들어 한창 개발이 벌어지던 때라 사업을 벌이기에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년 김익달이 [[만주]]에서 어떤 사업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단지 [[중국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잠시 다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 귀국과 결혼 ====
[[만주]]에서의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1세에 [[대구광역시|대구]]로 돌아온 청년 김익달은 [[폐결핵]]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만주]]에서의 사업 실패와 그로 인해 병까지 얻은 청년 김익달은 전생애에 걸쳐 가장 심한 좌절 속에 빠져 있었다. 죽음까지 생각했다는 [[대구광역시|대구]]에서의 몇 달 간은 청년 김익달을 더욱 강인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된다. 물론 그 자신이 스스로 이겨 낸 결과이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한 번 더 일어서 보자.'고 결심한 청년 김익달은 [[폐결핵]]을 고치는 방법으로 [[해주시|해주]]행을 택하게 된다. 당시 [[해주시|해주]]에는 그의 여동생이 [[황해도]] 도청 회계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의 동생은 도청 일로 알게 된 해주종합병원에 다리를 놓아 오빠인 김익달의 병을 고쳐 보려는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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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익달은 이곳에서 일생의 반려자가 된 하성련 여사를 만난다. 하성련 여사는 당시 김익달의 동생과 같은 직장인 [[황해도]] 도청 농촌진흥과에 타이프라이터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성련 여사의 고향도 [[대구광역시|대구]]였던 탓에 김익달의 동생과 동향이라는 동류의식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던 그들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성련 여사는 당시 김익달을 '미남형에 패기에 가득 찬 자신만만한 청년이었다.'고 기억하며, "해주항이 들어선 용당포는 퍽 아름다운 [[항구]]였지요. 우리는 [[황해|서해]]의 넘실대는 물결을 바라보며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분은 한밤중에도 불현듯 찾아와서는 '얼굴을 보지 않고는 잠을 이룰 수 없다.'고 고백할 정도로 정열적인 청년이었지요."라고 회고한다. 청년 김익달은 하성련 여사와 [[1941년]] [[1월 22일]] [[해주시]]에서 결혼을 한다.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다.
 
==== 해주에서의 생활과 수안으로의 도피 ====
병도 고치고 일생의 반려자를 찾은 청년 김익달은 한동안 접어두었던 출판에의 꿈을 다시 펼치기 시작한다. [[해주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청년 김익달은 시내 중심가에 ''''낙동서관'''(洛東書舘)'이란 서점을 차린다. 고향의 [[낙동강]]을 생각하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대구광역시|대구]]에서의 실패이후 7년여 만의 일이다. 낙동서관은 [[대구광역시|대구]]에서의 실패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번창했다. [[식민지]] 말기였던 당시 한국은 출판이란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출판물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서점들은 거의가 다 헌책을 위주로 한 책방이었다. 청년 김익달의 낙동서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쌓은 서점 경영에 대한 지식을 한껏 발휘하여 훌륭히 책방을 키워 나갔다. 특히 그는 [[징용]] 나가는 [[일본인]]들이 내놓은 책 중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끌어 모으는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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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 수안에서의 한 해는 영영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그동안 타관살이 같지 않게 여러 모로 보살펴 주셔서 더더구나 고맙구요. 일단 고향으로 갑니다만, 부디 서울에서 다시 만납시다. 수안에서 그토록 이야기하던 우리들의 시대를 우리가 껴안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광복 이후 대양출판사의 설립 ====
[[해주시|해주]]로 돌아온 김익달은 [[광복절|해방]]을 맞아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서둘러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길을 재촉한다. 당시 [[해주시|해주]]의 점령군이었던 [[소련]]군의 눈을 피해 [[38선]]을 넘은 것이 [[1945년]] [[8월]]이었다. 김익달이 [[수안군|수안]]에서 나와 [[해주시|해주]]를 거쳐 월남하기까지의 시간이 불과 한 달여 남짓이었던 것으로 볼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제 나의 시대가 왔다. 내 뜻대로 출판을 해서, 이 나라의 눈과 귀와 입을 열어 놓겠다.'라고 다짐을 하면서 38선을 넘은 김익달은 곧 대구로 내려와 구체적인 출판 사업에 발을 내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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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김익달이 간추린이란 순 우리말을 선택한 데는 나라 사랑이라는 깊고 큰 뜻이 숨겨져 있다. 미래를 이끌어나갈 청소년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일깨워 나라를 사랑하게 하는 일을 거창한 구호를 내세워 외치지 않으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실천해 낸 것이다. 김익달의 이러한 생각은 간추린 시리즈의 첫 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익달이 이 학습물 시리즈를 통해 제일 먼저 출판한 것은 《간추린 한국 지리》, 《간추린 생물》, 《간추린 물상》등 3종으로 모두 과학에 관한 책을 우선적으로 내놓았다. 학습물 하면 으레 국어, 영어, 수학 등을 먼저 내놓아야만 장사가 되는 법인데, 김익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우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알아야 하며, 이 땅에 더불어 사는 생명체를 알아야 하며, 그것에 기초하여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앞으로 올 세계는 과학이 선도하는 사회이어야 하며, 그것도 우리의 환경과 처지에 알맞는 합리적 사고가 주해야만 나라가 진실로 발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양출판사의 《간추린》 시리즈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각 지방의 총판들이 책을 찍어내기가 무섭게 앞다투어 사갔다고 한다.
 
==== 잡지 《학원》의 창간과 학원사의 설립 ====
=== 생애 중반 ===
==== 잡지 《학원》의 창간과 학원사의 설립 ====
'대양'이란 깃발을 내걸고 시작한 김익달의 출판 항해가 첫 번째 닻을 내린 곳은 《'''학원'''(學園)》이라는 청소년 [[잡지]]였다. 나라 전체가 [[한국 전쟁|전란]]에 휩싸여 있던 [[1952년]] [[11월]]에 [[대구시|대구]]에서 창간된 《학원》은 우리나라 본격 잡지 문화의 서장을 여는 고리였다. 전쟁으로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대구시|대구]]로 피난 온 서울 출판업자들이 감히 출판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 하고 있던 시절, 김익달은 이 혼돈된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 줄 터전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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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달은 《학원》을 발간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보다 실질적인 지원 제도를 마련하는데, 그것은 창간 기념 사업으로 벌인 학원장학사업과 창간 1주년 기념 사업으로 벌인 학원문학상이다. 학원장학사업이 청소년들이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여건을 뒷받침해 주는 물질적 지원 제도였다면, 학원문학상은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정신적 지원 제도였다고 한다.
 
==== 국내 최초의 민간장학사업, '학원장학회' ====
여유가 있어 남을 돕는 것은 생색을 내기 위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을 찾아 자기 것을 쪼개어 주는 일은 순수한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배고픔을 겪어 본 사람만이 참 도움의 방법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나눔은 곧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을 키울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가 고파 굶주려 있는 사람에게 보석을 주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에겐 허기를 이길 수 있는 밥을 주어야만 진정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 학원장학제도이다. 김익달 자신이 학창시절 뼈저리게 느꼈던 가난, 그 굴레의 무게를 덜어 주는 일을 그는 ''''학원장학회'''(學園奬學會)'를 통해 실천하기 시작한다. 김익달은 생전에 가진 한 인터뷰를 통해 학원장학회를 만든 직접적인 동기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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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2월 제1기 장학생 12명을 뽑은 학원장학회는 1985년 김익달이 별세한 후에도 큰아들인 김영수 씨가 유지를 받들어 장학사업을 계속 이어오다, 2005년 밀알장학재단과 통합하여 현재의 '''학원밀알장학재단'''(學園밀알奬學財團)에 이르고 있다. 밀알장학재단은 학원장학생 출신들이 '김익달 선생의 숭고한 은덕을 미약하나마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1997년 설립한 재단이다.
 
==== 전후 문단의 텃밭을 일군 학원문학상 ====
우리 문단의 중추를 이루는 문인들 중에는 '학원세대'로 불리는 '''학원파 문인'''이 있다. 이는 '''학원문학상'''(學園文學賞)을 통해 등단한 문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요즘이야 문인들의 등단 창구가 다양해져서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영향력 있는 등단 제도가 실제적으로 없지만, 1950년대 문단을 주도했던 것은 《학원》이었고, 그 시대 문학도들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었던 학원문학상 제도는 한 세대를 만들어낼 정도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