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구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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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이 위나라로 돌아 온 후, 진동도독으로 임명되어 양주에 와서, [[오 (삼국)|오]]의 [[제갈각]](諸葛恪)<ref> [[자 (이름)|자]]는 원손(元遜), [[오 (삼국)|오나라]]의 재상 [[제갈근]](諸葛瑾)의 장남. </ref>의 침공을 막았다. [[255년]] 관구검은 [[사마사]](司馬師)의 전횡에 분노, [[문흠]](文欽)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문흠]]이 [[사마사]]에게 지면서, 관구검은 야반도주하여 탈출하는 길을 선택했고 자연히 그가 거느린 말갈족을 비롯한 군대 군세가 약화되었다. 도주 중에 [[안풍진]](安風津) 도위부(都尉部)의 백성인 [[장속]](張屬)의 활에 맞아 죽었고 장속은 그 목을 경도(京都:수도)인 낙양으로 보내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다.
 
이후 장남인 [[관구전]](毌丘甸)은 반(反)사마씨 봉기를 일으켰다가 주살당했고, 차남인 [[관구종]]과 그의 아들이자 관구검의 손자인 [[관구오]]는 후에 서진(西晉) 시대가 되고 나서 출사했다. 중국 산시성(山西省) 순양궁(純陽宮)에 있는 '무구씨조상비관구씨조상비'(毋丘氏造像碑)는 관구검의 손자 무구오관구오(毋丘奧)가 만들었다.
 
==성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