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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어려운 시절에 10대의 꿈을 키웠던 학원 세대들에게 《학원》은 영원한 청춘이며, 그 세대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특권으로 남아 있다.
 
=== 출판계의 거목 ===
김익달을 일컫는 말 중 '한국 출판계의 대부'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김익달이 한국 출판 제1세대를 대표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만큼 김익달은 새로운 기획으로 한국 출판의 밑바탕이 되는 많은 출판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대양출판사 초창기에 《학원》편집장까지 맡았던 김성재 씨(일지사 사장)는 "김익달 사장은 앞을 내다보는 기획력과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센스와 이를 실천하는 과감한 모험심이 있는 출판인이다. 또 사람을 잘 만나서 잘 쓸 줄 아는 출판인이고 돈을 가치 있게 쓸 줄 아는 분이다. 사람의 의식 구조 형성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출판 문화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문화의 투기사였다."고 김익달의 면모를 회고한다.
 
김익달의 출판 족적을 더듬어 보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나라 사랑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김익달이 본격적으로 많은 출판물을 만들어내던 시기가 전쟁을 겪고 난 뒤였고, 그러한 때에 출판의 사명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초기 출판물의 경향은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청소년 중심의 출판물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함께 김익달은 '읽히는 출판'에 주력하는데, 이것은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을 담은 책이라도 읽히지 못하고 현실에서 쓰이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마친가지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즉, '지식도 살아 있는 지식이었을 때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출판을 통해 나타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전후 우리나라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잘사는 나라,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실제적인 지식이 필요한 때였다.
 
전쟁중에 대구로 내려가 있던 대양출판사는 휴전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남산 아래 양동에 자리를 잡는다. 이때부터 김익달의 출판에 대한 욕구는 봇물처럼 터져, 한국 잡지 문화의 터전이 되는 많은 잡지와 기발한 착상을 담은 많은 출판물을 내놓아 한국 출판 문화에 새로운 물꼬를 터놓게 된다. 이 시기에 김익달이 시도한 새로운 출판 방식들은 그 후 우리 출판 문화가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데 주춧돌 역할을 해 낸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많은 필자가 방대한 자료를 한데 모아 기획·출판하는, 소위 '집대성 출판 방식'의 시도이다.
 
이러한 출판 방식과 함께 김 선생의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새로운 편집, 제작 방식의 시도이다. 판형을 다양하게 하고 화보를 이용해 시각적 효과를 높임으로써 독자들의 독서 욕구를 늘려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익달은 평소 지녔던 출판에 대한 생각인 '읽히는 책, 쓰이는 지식'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김익달의 새로운 출판 방식은 자연히 제작 측면에서도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인쇄, 새로운 책의 모양들의 속속 등장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컬러 인쇄의 등장이다. 당시 출판계로 볼 때는 일종의 인쇄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컬러 인쇄는《학원》 창간호 표지였다. 그 후 학원사
《대백과사전》(전 6권)의 컬러 화보 등을 인쇄해 내면서 컬러 인쇄 방식에 많은 혁신을 이루게 된다.
 
《학원》편집장을 거쳐 학원사에서 여러 가지 출판물을 만들어냈던 채희상 씨는 "초창기의 사소한 일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항상 자신의 출판물에 최고의 인쇄 기술을 투여했다. 그러므로 학원사의 발전사는 이 나라 인쇄 문화의 발전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서 "출판에 있어서 본격적인 원색 인쇄 시대를 주도한 것은 학원사의 책들이었다. 특히 1965년 창간한 《주부생활》의 표지와 원색 화보는 당시까지 나왔던 한국 잡지 중에서 최고의 호화본으로 꼽혀, 다른 잡지들로부터 '지나치다', ' 현실에 맞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김익달이 서울 수복 후 서울에서의 출판 시대를 열면서 내놓은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화집이라고 할 수 있는 마해송 씨의 《떡배, 단배》였다. 이어 그는《학원 명작선》, 《세계위인문고》(전 50권) 등 청소년들의 정신의 밑거름이 될 만한 출판물들을 기획, 세상에 내놓는다.
 
청소년물에 힘을 쏟던 김익달은 1955년 이 땅의 최초의 본격 여성지가 되는 《여원》을 창간하여, 튼튼한 사회의 기반이 되는 여성 문화 형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김익달은 《여원》을 창간하면서 '여성문화주의를 통한 여권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즉, 여성 중심의 세계관이 형성될 때 세상은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김익달은 이미 '여성 해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여성 운동을 김익달은 그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이미 출판물을 통해 실천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남성과 대립되어 남성을 극복의 대상으로서 보는 여성 운동이 아니라 여성문화주의를 내세워 모성적 세계관으로 끌어들이려는 여성 운동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여원》창간사에 나타난 김 선생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해방 10년을 맞이하는 오늘, 과연 어느 정도의 남녀 동등권은 획득되었으며,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여성으로서의 이바지함은 얼마나 컸었는가를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무언가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음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 이유를 살피건대, 여성들의 문화 의식이 높지 못하다는 결론에 용이히 도달하게 된다. 어느 나라든, 여성의 문화 의식이 얕고서 그 국가 사회의 번영 발달을 바랄 수 없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여원》을 창간한 그 해 12월 김익달은 대입 수험을 위한 수험 교양지 《향학》을 창간한다. 이는 1960~1970년대 대입 수험지 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는 셈이다. 김익달의 시대를 앞선 출판 의지는 백과사전을 비롯한 사전류 출판에서 정점을 이루며, 농촌의 발전을 도모한 《농원》을 비롯한 농업 관계 서적, 생활 관계 서적, 건강 관계 서적, 문화 관계 서적 등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 중 1965년에 창간한 《주부생활》은 여성지의 대명사로, 현재까지 한국 여성 잡지계를 주도하고 있으며, 생활, 건강, 레저 관련 서적 등은 최근 전문화된 출판물로 자리잡는데 기틀을 제공한 셈이 된다.
 
=== 출판의 꽃, 《대백과사전》 ===
김익달의 출판 사업의 정점을 이루는 《대백과사전》(전 6권)이 나온 것은 1958년부터 1959년까지이다.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 사업은 당시로 볼 때는 일종의 출판 혁명이었고, 한국 출판 역사상으로 볼 때도 커다란 사건에 해당된다. 또한 《대백과사전》의 출간은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세계대백과사전을 보유하는 문화국의 위치로 끌어올린 셈이 되었다.
 
《대백과사전》의 출간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언론 매체의 기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동경에서 열린 '국제서적전시회'에 한국 출판물로는 《학원 대백과사전》만이 출품되어 일본인을 비롯한 각 외국인들을 경탄케 하였다. 아직도 한국은 미개한 국가로 그릇 인식한 그들에게 건국 10년간 이같은 초경이적인 문화 발전을 이룩하였다는 사실은 과연 대한 민족 문화 의지력을 과시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오로지 김 사장의 천신 만고한 노력의 결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백과사전》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당시로서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는 상태였고, 필자 동원에도 무리가 따랐던 것이 사실이다. 한 나라의 문화를 집대성하는 엄청난 작업인데도, 국가 기관이나 공공 단체의 지원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만큼 당시에는 미래를 내다 본다던가 내일을 설계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대백과사전》의 편집장을 맡았던 최덕교 씨는 "김 선생의 이러한 발상에 처음에는 너무 놀랐고, 구체적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니 너무 엄청난 일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 선생의 결심 앞에서는 어떤 어려움도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약졸도 훌륭한 장수를 만나면 용사가 된다고 하던가? 내 비록 분수도 모르고 덤비는 일이지만, 사장의 그 큰 뜻을 따르기로 하자고 마음을 다져 먹고 시작했다. 1958년 1월 '대백과사전 편찬부'를 구성하고 9개월 여에 걸친 작업 끝에 첫 권을 내놓을 수가 있었다. 짓밟혔던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도로 찾아 여기 민족의 긍지로써 백과사전을 낸다는 김 사장의 감격어린 발간사, 각계의 권위 4백 30여 명의 필자, 본문 9백 60페이지, 별색 원색판, 단색 사진판, 다색 지도 등 54페이지, 1천 페이지가 넘는 당당한 모습, 그같이 큼직한 책을 1만 부를 내놓고, 사장 이하 모두가 환성을 올렸다. 누구도 이토록 짧은 시간에 방대하고 엄청난 일을 해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제6권이 완간된 것은 이듬해인 1959년 5월이었다. 총 6천 페이지가 넘는 거대한 책을 우리 힘으로 완성시킨 것이다."라고 당시를 생생히 기억해 냈다.
 
일은 해 놓고 보아야 한다는 김익달의 평소의 지론이 폭풍우 같은 추진력으로 증명된 셈이었다.
 
그러나 백과 사전을 편찬하는 데는 긴 시간과 함께 큰 돈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대백과사전》의 원고를 완성시켜 놓았을 때는 학원사는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출판계에서는 '학원사는 이미 망해 버렸다.'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기업의 세계는 냉혹하기 이를데 없어서 학원사가 망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때부터는 모든 거래인들이 누구도 김익달을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가 종이만 대 주어서 백과사전이 나오기만 하면 출판계에서 선풍을 일으키게 될 것만은 틀림이 없건만, 오랫동안 거래해 오던 지업상들도 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얼굴을 돌려 버렸던 것이다. 이때 "김 선생은 너무도 안타까워 언젠가는 우이동으로 혼자 달려가 풀밭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소리를 내어 통곡한 일도 있었다."고 정비석 씨는 회고한다. 그러나 김익달의 인격을 믿는 어떤 투자가가 종이를 대 주어서 예정대로 1958년 9월 15일 《대백과사전》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김익달의 예상은 적중하여 《대백과사전》은 선풍을 일으켰다. 학원사로서는 그야말로 사운을 걸다시피 했던 백과사전 출판이 결과적으로 학원사에 영예와 돈을 한꺼번에 가져다 주었다. 김익달은 출판계 최초로 월부 판매 방식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들어맞아 1960년대 초까지 3~4년 동안에는 무려 5만 질(30만 권)이상이 팔려 나갔다. 《대백과사전》은 그 후 3차례에 걸쳐 전 12권, 전 15권으로 개정ㆍ증보를 거듭하여 1973년에 전 20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한국 출판사상 기념비적 출판물로 평가되고 있다.
 
김익달의 집대성 성격의 기획 출판 능력은《대백과사전》외에도 많은 기념비적인 출판물을 내놓았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꼽아 보면《과학대사전》(전8권), 《국민의학전서》(후에《가정의학대전》, 《가정의원》등으로 6차례 개정판 발행) 및 《문예사전》, 《농업대사전》, 《철학대사전》, 《요리전서》등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김익달은 나라 사랑 정신을 담은 영문판 《KOREA》라는 책자를 1960년에 발간한다. '한국의 문화와 사람들'이란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은 우리나라를 세계 각국에 소개하기 위한 책자였다. 황수영, 김원룡 씨 등 당시 각계 전문 학자 50여 명이 집필한 이 책은 세계 유수의 대학 도서관을 비롯, 각국의 중요한 도서관에 비치되었는데, 소련의 모스크바 대학 도서관에까지 비치되어 한창 냉전으로 얼어붙었던 공산권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중요한 외교사절 역할을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