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 지배 하의 조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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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1년 전의 러시아-조지아의 관계 ===
16세기에는, 조지아 전역에서 [[오스만 제국|오스만 투르크]]와 [[사파비드 왕조|사파비드 페르시아]]와의 두 커다란 무슬림 제국들이 싸우게 되어, 조지아의 기독교 왕국은 일련의 작은 주들로 분열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2반세기 동안에는 세 번째 제국의 군사력이 북부에 출현하였고, 즉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지아의 [[정교회]]를 함께 믿었다. 1558년과 1589년에 시작된 조지아 [[카헤티 왕국]]과 [[모스크바]]가 외교적으로 접촉하였고, [[차르 표도르 2세]]가 왕국을 그의 보호아래 두라고 권했다. 아직은 약간의 도움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고 오스만과 페르시아의 통제에 성공적으로 도전하기에는 러시아는 여전히 남부 캅카스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18세기 초반에야 진심으로 남부 캅카스에 군대가 진입하게 했다 .1722년에, [[표트르 대제]]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혼란을 이용하여 남캅카스의 원정을 영웅적으로 이끌었고, 카르틀리의 조지아 통치자 [[바흐탕 6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 두 군대들은 연합에 실패하였고, 러시아는 조지아에게 페르시아의 미련을 남겨두고, 다시 북방으로 후퇴했다. 바흐탕은 그의 고국인 러시아로 망명하여 그의 여생을 마쳤다.
 
 
바흐탕의 후계자, [[에레클레 2세]]는, 1762년 부터 1798년까지 카르틀리-카헤티의 왕이었고, 1768년에 러시아가 오스만과의 전쟁을 공표했을 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공동 작전 행동을 하자는 러시아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는 투르크에 대항하여 그녀의 전쟁에 [[그루지야]]와의 동맹을 간절히 열망했지만, [[조지아 (국가)|조지아]]에게 빈약한 세력만 보냈다.<ref>[[:en:Ronald Grigor Suny|Suny]] pp.57-58</ref> 1769~1722년에는, 토틀레벤 장군의 몇명 안되는 러시아 병력들이 현재의 이메리티와 카르틀리-카헤티에 있었지만, 남캅카스에서 오스만 전력과 소규모의 그루지야 군대와의 대치에 연루되는 것을 자제했다. 1774년에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평화협정에 서명하였다. 러시아는 약간의 득을 봤고, 조지아의 이메레티와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은 그 전쟁이 끝나고 주변국(페르시아와 오스만)들에 노출된채 남겨졌다. 그 주변국들은 캅카스에 조지아가 러시아의 동맹을 맺는 것을 흐트려 놓았다. 1783년 에리클레는 러시아와의 [[게로그기예프스키 조약]]에 서명하였고, 따라서 카르틀리-카헤티는 러시아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79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는 병력을 다른 곳에 쓰려고, 조지아에서 그들의 병력을 철회했고, 에리클레 왕국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1795년에, 페르시아의 샤흐, [[아그하 모함메드 칸]]은 러시아와 카르틀리-카헤티의 동맹에 대하여 격분했고, 에리클레에게 동맹을 규탄하고 그의 왕국을 페르시아의 영향권으로 되가져오라고 요구했다. 에리클레는 러시아와의 그의 조약에 대해 신념이 남아 있었고, 아크하 모함메드 칸의 최후 통첩을 거절했다. 아크하 모함메드 칸은 그루지야를 침략했다. 페르시아의 군사력은 소규모의 조지아 군대보다 거의 열배가 넘었다. 그루지야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심각한 손상을 입혔지만, 그들의 수도 트빌리시가 빼앗겨 불타는 것을 멈출수 입는 입장은 못되었다.<ref>Suny pp.58-59</ref>
 
=== 러시아와 합병 ===
게오로기옙스키 조약을 명시한 명예는 훼손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루지야의 통지자는 국민들이 어디로든 돌아간야 한다고 느꼈다. 이레클레가 죽은 후, 카르틀리-카헤티의 옥좌의 계승을 두고 내전이 터졌고 경쟁 후보들은 러시아의 간섭으로 지명되었고,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1801년 1월 8일, 챠르 [[러시아의 파울 1세]]는 러시아 제국과 그루지야(카르틀리-카헤티)를 결합하자는 법령에 서명하였다.<ref> Gvosdev (2000), p. 85 </ref><ref> Avalov (1906), p. 186 </ref> 그 법령은 1801년 9월 12일에 챠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알렉산드르 1세]]의해 확실시 되었다.<ref> Gvosdev (2000), p. 86 </ref><ref>[[:en:David Marshall Lang|Lang]] (1957), p. 249 </ref>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그루지야]]의 외교관, [[가르세반 찹찹드제]]는, 러시아의 차관 [[알렉산드르 쿠라킨]]이 참여한 항의 통보에 반응하였다.<ref> Lang (1957), p. 251 </ref> 1801년 5월에 러시아의 장군 카를 헤인리츠 크노르린그는 [[그루지야]]의 권력으로부터 [[다윗 바그라티오니|다윗]] [[바토니슈빌리]]의 왕위 계승권을 없애 버렸고 이반 데트로비치 라사렙을 수뇌로한 일시적인 통치 기관을 배치했다.<ref> Lang (1957), p. 247 </ref>
 
그루지아의 귀족들 중 일부는 크놀린그 장군이 귀족들을 [[트빌리시]] [[트빌리시 시오니 성당|시오니 성당]]에 잡아두고 그들에게 러시아 제국 왕권에 충성맹세를 하라고 강요하던 때인 1802년까지 그 법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크놀린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체포되었다.<ref> Lang (1957), p. 252 </ref> 1805년 여름에 러시아 대군은 [[아스케라니 강]]과 자감가까이에서 페르시아의 군대를 패배시켰고, 트빌리시는 그들의 공격으로 부터 안전해졌다. 1810년에 이메레티 왕국(동조지아)은 [[솔로몬 2세]] 왕의 저항의 진압 이후에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ref> Anchabadze (2005), p. 29 </ref> 1803년부터 1878년까지, 터키와 이란에 대항한 무수한 러시아의 전쟁의 결과로, 이전의 몇몇 조지아 영토들은 러시아 제궁에 합병되었다. 이 지역중 몇 지역들([[바투미]], [[아르트빈]], [[아칼트시케]])는 (후일에 터키가 조지아 공화국을 1918~1921년에 합병하려고 시도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현재 조지아의 주의 영토의 부분들이다. 조지아는 그 시기중에 첫 번째로 재통일 되었지만, 그들의 독립을 상실했다.
 
== 러시아 통치의 초기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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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 출판사 = [[:en:Indiana University Press|Indiana University Press]]
| 출판년도연도 =1994
| 판 =2nd
| id = ISBN 0-253-209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