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긴 백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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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킨 로스 경이 된 토마스는 [[1633년]] [[6월 21일]] 엘긴 백작에, [[1641년]] [[7월 30일]]에는 홀튼의 브루스 남작(Baron Bruce of Whorlton)에 서임되었다. 2대 백작이 된 그 아들 로버트는 1662년에 아이레스베리 백작(Marquess of Ailesbury), 카운티 오브 베드포드의 암프트힐 브루스 자작(Viscount Bruce of Ampthill, in the County of Bedford), 카운티 오브 요크의 스켈튼 브루스 남작(Baron Bruce of Skelton, in the County of York)에도 서임되었다.(엘긴 백작 제외한 모두 잉글랜드 귀족) 이후 이러한 작위는 4대 백작이 사망할 때까지 동일인에 의해 유지되었다.
 
3대 백작이 된 것은 2대 백작의 유일한 성인 남자인 토마스로 1685년에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명예혁명]] 당시 [[오라네 공]] [[윌리엄 3세]]의 잉글랜드 상륙 후에도 [[제임스 2세]]를 지지한 계속 겨우 네 명의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제임스 2세의 런던 탈출에도 동행했다. 또한 제임스 2세의 왕위 탈환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1696년]]에는 [[런던탑]]에 수감되었다.
 
3대 백작이 죽자 그의 아들 찰스가 4대 백작되었다. 그는 이외에도 [[1746년]] [[4월 17일]]에 카운티 오브 윌트에서 토트넘의 브루스 남작(Baron Bruce of Tottenham, in the County of Wilts ; 영국 귀족)에 서임되었다.
 
1747년 4대 백작이 죽었을 때 그에게는 딸 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이레스베리 백작과 그 후속 칭호와 홀튼의 브루스 남작은 단절되었고, 킨 로스 경은 단절되었지만, 엘긴 백작은 먼 사촌인 제9대 킨카딘 백작 찰스 브루스에게, 토트넘의 브루스 남작은 4대 백작의 여동생의 아들인 토마스 브루드넬 브루스가 상속했다. 또한 킨 로스 경은 [[1868년]]에 귀족원에 의해 4대 백작의 딸의 아들인 제3대 샨도스 공작 제임스 브리지가 정당한 상속인이었다고 결정되어 현재는 모계 자손이 보유하고 있다.
 
5대 백작은 [[1771년]] [[5월 14일]]에 사망하였고, 불과 7세에 작위를 물려받은 아들 윌리엄도 같은 해 [[7월 15일]]에 사망했다. 그 때문에 윌리엄의 동생 토마스가 5세에서 7대 백작이 되었다. 그는 자라서 외교관이 되었고, 특히 오스만 주재 영국 대사로 [[이스탄불]]에 부임했을 때 오스만 제국령이었던 [[그리스]]에 남아 고대 그리스의 건축과 조각을 조사하고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을 긁어내어 영국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현재 엘긴 마블로 불리며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전시되어 있지만, 그리스 정부로부터 반환을 요구받고 있다.
 
7대 백작이 죽자 그 아들인 제임스가 8대 백작이 되었다. 그는 [[1842년]]부터 [[1846년]]까지 [[자메이카]] 총독을, [[1847년]]에서 [[1854년]]까지 [[캐나다]] 총독을 지냈다. [[청나라]]의 [[제2차 아편 전쟁]]에서는 특파원 대사(High Commissioner ; 고등 판무관)로 현지에 파견되어 [[톈진조약]](1858년), [[베이징 조약]](1860년)을 체결했다. 또한 그 사이에 [[에도 막부]] 말기의 일본을 방문하여 [[영일수호통상조약]](1858년)을 체결했기 때문에 일본에서 ‘엘긴 경’ 혹은 ‘엘긴 백작’을 말할 때 그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 후 [[1861년]]에 [[인도]] 총독(부왕)에 임명되어, [[1863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9대 백작이 된 빅터는 8대 백작의 아들이다. 그도 정치인으로 1894년부터 1899년까지 인도 부왕을 맡아 1905년에는 자유당의 헨리 캠벨 배너먼 내각에 식민지 장관으로 입각했다.
 
9대 백작이 죽자 그의 아들 에드워드가 10대 백작되었다. 현재 엘긴 백작은 10대 백작의 아들인 앤드류로 [[1968년]]에 작위를 이었다.
 
==엘긴 백작(163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