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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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 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피카소]], 작곡가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샤넬은 이 초상화를 입수하지 못했다. 현재 초상화는 파리의 올랑쥴리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와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이에 샤넬은 불행한 사자자리의 숙명을 가진 여자라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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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샤를르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과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자, 샤넬은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비난에 직면해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전후 수년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이러한 경위로 현재도 샤넬은 <나치스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혐오감이 [[프랑스]]에선 강하다.
 
[[1954년]]에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릿츠 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했다. 샤넬의 2차대전 당시 언동에 강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던 당시 유럽에선 <매국노>라는 경멸과 나치독일에 대한 혐오감이 전쟁이 끝난 후 10여년간 샤넬의 발목을 잡아 위상이 약했다. 이와 반대로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그녀의 참신한 패션은 열광적인 선풍을 끌었다.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는데 미국에선 <과거 50여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디자이너>로서 모드 오스카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71년]], 거주하던 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콜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8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협력한 혐의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에 의해 프랑스의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여 어쩔 수 없이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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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
{{Commons category위키공용분류|Coco Chanel}}
* {{Official공식 website웹사이트|http://www.chanel.com/}}
* {{Navercast|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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