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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檀君 또는 壇君)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한민족]]의 신화적인 시조이자 [[고조선]]의 건국자<ref name="Dangun1">[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55046&v=43 단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ref name="Dangun2">[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B&i=122855&v=43 단군], 《[[브리태니커 백과]]》</ref> 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시조로 추앙 받았으며 [[대종교]]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ref>[http://www.daejonggyo.or.kr/ [[대종교]] 공식 홈페이지]</ref> 단군은 직책으로 보이며 왕검, 왕험(王儉)으로도, 임검(任儉)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역사서중에역사서 중에 하나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나오는 [[한민족]]의 으뜸가는 조상의 이름이다.<ref name="Dangun1"/><ref name="Dangun2"/>
 
== 생애 ==
단군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경에<ref> {{서적 인용 |제목= [[동국사략]] | 저자= [[권근]] 등 |꺾쇠표 =예|연도= 1402 |장= |인용문=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당요 25년 무진년) (國人立爲君(唐堯二十五年戊辰)}} </ref> 아사달(阿斯達) 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단군조선|조선]]을 건국하여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지며, 단군의 뒤를 이어 [[기자 (고조선)|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 단군은 고조선의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1000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하는 기록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이미 단군은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누대에 걸친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ref> 《[[동국통감]]》 〈외기(外紀)〉, 1485년. </ref>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응제시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三朗城)을 쌓고 태자 부루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에 참석시켰다고 한다.
 
=== 문헌 기록 ===
단군에 대한 기록 실린 역사서는《[[삼국유사]]》, 《[[제왕운기]]》이다. 고려때고려 때 기록이며.이전기록에이전 기록에 단군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 이전 기록인《[[삼국사기]]》에서는 단군이란 글자는 없지만 “선인 왕검”이란 글자가 보인다.
고려 이전 기록인《[[삼국사기]]》에서는 단군이란 글자는 없지만 '선인 왕검'이란 글자가 보인다.
 
《[[제왕운기]]》에는 단군의 출생과 생애에 대해 약간 다른 기록이 전해진다. 《제왕운기》는 《본기(本記)》를 인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손녀와 신단수(神檀樹)의 신이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하고 1028년 또는 1038년 또는 1048년<ref> 《본기》의 인용은 1028년으로 되어 있으며, 《제왕운기》의 본문에는 1038년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연도를 통해 계산을 해 보면 1048년이 실제 재위 연도이다. </ref>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제왕운기》의 단군은 ‘박달나무 단(檀)’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왕검(王儉)이란 글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동천왕]] 21년([[247년]])조이다.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의 기록에 세주로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원문,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으로 등장한다. 인명(人名)으로 왕검이 등장하는 것은 이 기록이 최초이며 일반적으로 이를 단군왕검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인명이 아닌 경우 [[위만]]이 도읍하였던 고조선의 수도에 왕검 또는 왕험(王險)이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선인 왕검에 대한 기록과 함께 선인 왕검이 왕이 되어 도읍한 곳이 왕험이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12000209101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1-20&officeId=00020&pageNo=1&printNo=5075&publishType=00010|제목=五千年間朝鮮(오천년간조선)의 얼, 始祖檀君(시조단군)|언어=한국어|이름=정인보 논설위원|날짜=1935-01-20|출판사=동아일보|확인일자=2012-07-17}}</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