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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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의 영향'''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직후 유럽에서 발생한 민중봉기는 《선언》과 직접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혁명적 시대정신을 가장 선명하게,급진적으로 드러낸 문건임을 확인시킨 것은 틀림없다.<ref>유강은 역《공산당선언》그린비,94쪽</ref>
1871년의 파리코뮌은 《선언》의 직접적 결과는 아닐 수 있어도, "'''[[파리코뮌]]'''이 《선언》의 정신적 자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한 [[프리드리히 엥겔스|엥겔스]]의 말대로 파리코뮌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전체를 노예제도에서 자유롭게 정치, 사회적 해방을 확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권력을 수립한..세계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연습"이었다.
1881년,《선언》에 나타난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국회의원 12명을 당선시킴으로써 엥겔스는 이를 두고"프롤레타리아가 이룩한 가장 눈부신 업적"이라고 했다. 또한 엥겔스는 《선언》이 "전체 사회주의 문헌 가운데 가장 널리 유포되고 가장 국제적인 작품이며 시베리아에서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모든 나라의 수천만 노동자들에게 인정받는 공동 강령"이라 평했다.<ref>유강은,위의책,116,118쪽</ref>
 
'''《선언》의 실현''':
마르크스는 1882년 《선언》의 러시아 개정판에서 [[러시아]]에서의 혁명가능성을 언급했다.그리고 1917년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그러나 레닌이 얼마 못가고레닌에서 스탈린에게로스탈린으로 권력이 이양되면서 사태는 역전되었다. 마르크스가 《선언》에서 예견했던 개인들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 신장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도래하지 않았다. 한편, 독일에서도 1919년,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한 봉기가 발생했다. [[총파업]] 투쟁은 전국을 뒤덮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노동자여 행동하라! 용감하고 과감하고 철저하게 행동하라!' 는 구호 아래 혁명을 시도하나, 진압되었다.<ref>유강은,위의책,120쪽</ref>
 
'''68혁명기''':
[[68혁명]]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이상 세계를 뒤흔드는 여파를 끼쳤는데, 이는 《선언》의 [[평등]] 이념의 확실한 복귀이자 확장에 다름 아니었다.68혁명의 주체로 등장한 신좌파는 구좌파를 지양한, 즉 변증법적으로 발전을 이룬 세력이었다.
[[신좌파]]는 구좌파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경제적 착취를 강력히 반대했다. 바로 《선언》의 복귀였다.동시에 착취 개념을 무한정 확장함으로써 《선언》을 한층 발전시켰다. 사회적,문화적,관료적,인종적,성적 착취 등과 아동학대까지 거의 모든 사회문제와 불평등에 저항했다.<ref>유강은,위의책,143쪽</ref>
 
== 《공산당 선언》의 경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