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시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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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시황제'''({{zh-cp|c=秦始皇帝|p=Qín Shǐ Huáng Dì}},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는 [[전국 칠웅]] [[진 (춘추 전국)|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중국]] 최초의 [[중국의 황제|황제]]이다.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혹 '''조정'''(趙政)이다. 혹, 씨는 '''진(秦)''', '''조'''(趙)다.<ref>조정(趙政)이 시황제의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조가 진나라 황실의 씨 - 곧 진 황실은 영성 조씨 - 이며 정은 이름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ref> 성명은 '''영정'''이고, 혹 씨명은 '''조정'''이며,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대로 여정(呂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