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티액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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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트 요새 포위전 ===
서부 펜실베니아 정착민은 전쟁 발발 후 안전한 곳을 찾아 피트 요새로 대피하였다. 거의 550명에 가까운 사람들으로사람들로 요새가 붐볐으며, 그 중 200명 이상은 여자와 아이들이었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151; Nester, ''"Haughty Conquerors"'', 92.</ref> 스위스 태생의 영국군 지휘관 시미언 에큐이어는 “요새 안은 북새통이었기 때문에 나는 전염병을 두려워했다. 천연두가 유행하고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ref>Dixon, ''Never Come to Peace'', 151.</ref> 피트 요새는 [[6월 22일]]에 델라웨어족을 중심으로 하는 인디언의 공격을 받았다. 요새 방어가 우수했기 때문에 7월 내내 포위공격을 버텼다. 한편 델라웨어족과 쇼니족의 전사가 펜실베니아 깊이 침투하여 포로들을 잡고, 농장 여기저기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주민들을 죽였다. 피트 요새 동쪽의 2개의 작은 요새, 베드포드 요새와 리고니에 요새가 산발적인 공격을 받았지만, 점령 상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ref>Dowd, ''War under Heaven'', 130; Nester, ''"Haughty Conquerors"'', 97–8, 113.</ref>
 
전쟁 전 영국군 애머스트 장군은 인디언이 영국군 통치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했지만, 그 해 여름의 군대의 처지는 냉혹했다. 애머스트는 부하들에게 포로가 된 적인디언을 “즉각 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763년]] [[6월 29일]], 피트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펜실베니아 랭커스터에서 원정대를 준비하고 있던 헨리 부켓 대령에게 애머스트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불만을 품은 인디언 부족에게 천연두를 보낼 수는 없을까? 이놈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쓸 수 있는 모든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ref>Peckham, ''Indian Uprising'', 226; Anderson, ''Crucible of War'', 542, 809n.</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