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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년]]에는 옛 전진 세력의 근거지였던 상규(上邽)를 점령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동진의 [[낙양]](洛陽)을 공격하였다. [[399년]]에는 낙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는데 이 군사 행동에 한수(漢水)와 회수(淮水) 이북의 군현들이 후진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400년]]에는 농서를 공격하여 [[서진 (오호십육국)|서진]](西秦)을 멸망시켰으며 [[401년]]에는 [[후량 (오호십육국)|후량]](後凉)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해부터 북위와 외교 마찰이 생겨 북위의 공격을 받았으며, [[402년]]에는 시벽(柴壁)에서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이후 북위와 후진은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403년]]에는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서량]](西凉), [[북량]](北凉), [[남량 (오호십육국)|남량]](南凉)을 모두 속국으로 만들었다. [[405년]]에는 [[구지]]도 복속시켰다. 한편 장안에는 [[남연]](南燕)의 황제 [[모용초]](慕容超)의 모친과 부인이 살고 있었다. [[407년]] 말, 모용초가 요흥에게 이들을 송환해 줄 것을 요구하자 요흥은 송환의 조건으로 태악(太樂)을 바치고 속국이 될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요흥은 불교에 심취하여 401년 후량에 머물고 있던 [[구마라습]]의 신병을 확보하여 장안으로 데려왔다. 요흥은 구마라습을구마라집을 국사로 삼고 각지에 사원을 건설하였다. 또한 불경을 번역하게 하고 대승정(大僧正)을 임명하기도 하였다.
 
[[405년]] 말, [[동진]](東晉)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 (송)|유유]](劉裕)가 한수 일대의 12개 군을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를 승락하였다. [[406년]]에는 남량에 양주(凉州)의 수도 고장(姑臧)을 빼앗겼으며 사실상 남량, 북량, 서량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407년]]에는 [[혁련발발|유발발]](劉勃勃)이 반란을 일으켜 [[하 (오호십육국)|하]](夏)를 건국하는 등 내분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후진은 하와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계속 쇠퇴하였다. [[409년]]에는 멸망시켰던 걸복부의 서진이 독립하였고 구지도 자립하였다. [[410년]]에는 [[후촉 (오호십육국)|후촉]](後蜀)과 연합하여 동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에 요흥은 [[413년]]에 북위와 인척 관계를 맺어 대응하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