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키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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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문명개화]]에 따라 도요하라 지카노부, 오치아이 요시이쿠, 3대째 우타가와 히로시게, 2대째 우타가와 구니테루 등이 빨간색을 강조했던 개화 그림을 그린 것 외에 구소쿠야(具足屋)를 발행소로, 우타가와 요시쿠가 그림을 그린 [[1874년]] 발간한 도쿄매일 신문과 이듬해 [[1875년]], 쓰키오카 요시토시가 그림을 그린 금승당(錦昇堂)에 의한 우편호치신문 등으 신문에서 니시키에가 그려졌지만, 이 유행은 오래 가지 못했고, 몇 년 동안 쇠퇴해 갔다. 또한 [[1876년]], 고바야시 기요지카가 모노톤으로 서정성 있는 코오세가(光線画)를 발표하면서 이노우에 야스하루와 오구라 류손, 오사카의 노무라 요시쿠니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때마침 대두된 [[국수주의]]에 의해 그 유행도 [[1880년]]에는 사라져 버렸다.
[[파일:Weihaiwei surrender.jpg|섬네일|280px|웨이하이웨이에서 항복, 미즈노 도시가타의 니시키에]]
 
그 외,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따라 [[고바야시 기요지카]] 외에도 [[미즈노 도시가타,]] [[도시히데 미기타]] 등이 보도 화면으로 전쟁 그림을 그린 바 있으며, 이러한 [[러일 전쟁]] 시절이 니시키에의 마지막 붐이었다. 당시 유행한 석판화가로 알려져 있던 야마모토 시욘이 [[1906년]]부터 [[1909년]]에 걸쳐 우타가와 파(歌川派)의 것과 다른 미인화 ‘지금 모습’(今すがた) 시리즈를 발표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거역하지 못하고 니시키에는 점차 쇠퇴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