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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훈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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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천종악(千鐘嶽)이며, 어머니는 병부시랑 전탁(錢鐸)의 딸이다. 9세에 외삼촌 전륜(錢倫)에게 의탁되어 공부하였다.
 
[[1571년]] 무과에 장원 급제하여 1575년에 총절사(總節使)가 되어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내직인 내위진무사(內衛鎭撫使)가 되었으나, 남의 참소를 입어 양릉(陽陵)에 귀양살이하였다. 8년의 귀양살이 후에 태청전수위사(太淸殿守衛使)와 총독오군사를 겸직하였다. 태청전수위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이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두 아들 천상(千祥), 천희(千禧)과 함께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조선]]에 와서 군량 수송업무를 관장하였다.
 
철기(鐵騎) 2만 명을 거느리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곽산]](郭山)에서 첫 전투를 이긴 다음, 평양(平壤)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을 포위하였다. [[평양 전투|제3차 평양 전투]]에서 칠성문(七星門)을칠성문을 공격했는데, 대포로 문짝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 승세(勝勢)를 타고 싸운 결과 1,280여 급(級)을 참획(斬獲)하였다. 계속 싸우면서 동래(東萊)에까지 이르는 동안 연전연승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어놓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마귀 (명나라)|마귀]](麻貴) 제독을 따라 파병되어, [[중사마]](中司馬)로서 일본 군사와 직산(稷山)에서 싸웠는데, 매복하였다가 들이치자 적들은 풀대 쓰러지듯 하였으며, 울산(蔚山)까지 도망치는 적을 승세를 타서 곧바로 무찔러 버리고 그 공로를 서생진(西生鎭)의 층암절벽에 새겼다.
 
왜란이임진왜란이 끝나자 [[1600년]](선조 33) 8월 만세덕(萬世德)·이승훈(李承勛)은 귀국하였으나, 그는 따라가지 않고 조선에 머물러 살았다. 왕경(王京)에 머무르면서 금강산(金剛山)에 세 번 가보고 두류산(頭流山)에 두 번 올랐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읊어 감회를 털어놓았다. 대체로 천만리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이국 땅의 고신(孤臣)이 된 것은 명나라가 마지막 운수에 들어서고 중국이 오랑캐 땅으로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후손들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다.
 
[[조선 선조|선조]]는 그의 전공을 생각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봉조하(奉朝賀)의 벼슬을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여 전(田) 30결(結)을 급복(給復)하였으며, 그의 장남 [[천상]](千祥)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차남 [[천희]](千禧)는 평구도찰방(平邱道察訪)으로 승진시켜 자손에게 세록을 전수받게 하였다.
 
[[조선 숙종|숙종]](肅宗)이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여 종향(從享)하도록 명하였고, 1827년 순조(純祖)는 신주(神主)를 부조(不祧)하도록 하였다.
 
정1품 숭정대부 궁내부특진관 [[김영목]]에 의해 시장이 작성되었으며, [[1910년]] [[7월 26일]] [[순종]]은 종헌의 뜻이 담겨져 있는 충장(忠莊)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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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
저서로 시 44수와 문 2편이 사암천문집에 전한다.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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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명나라의 정치인]]
[[분류:조선의 무신]]
[[분류:조선의 시인]]
[[분류:조선의 작가]]
[[분류:중국계 한국인]]
[[분류:명나라의 임진왜란 관련자]]
[[분류:과거 급제자]] <!-- 명나라 -->
[[분류:영양 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