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바뀜

842 바이트 추가됨 ,  3년 전
편집 요약 없음
 
== 생애 초반 ==
[[전라북도]] [[익산]]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그 후 [[서울]]로 이사와서 초등학교 6학년때6학년 때 어머니를 잃고 누나들의 보살핌 속에 [[고려고등학교]]를 나와 [[1985년]] [[한국 외국어 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 노문학과에 입학했다. 1년1년간 동안 외대한국외국어대학교 학보사에서 학생기자로학생 기자로서 활동했다. 장래 패기있는 신문 기자를 꿈꾸며꿈꾸면서 학보사학보사에서 활동을 했으나활동했으나 뜻이 맞지 않아 이후그 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외국어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교학생운동권에서 학생 운동권에서 적극적으로적극으로 활동하여 [[1988년]]에는 CA 그룹 학생회장 후보 선거운동본부 조직국장, [[혁명적 노동자 계급투쟁동맹|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혁노맹)의 전신인 “혁명의 불꽃” 그룹 선동국장을 맡기도 했다. [[경기도]] 소래 ‘작은자리’에서 일주일간 개최된 혁노맹[[혁명적 노동자 계급투쟁동맹|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 결성대회에결성 참가하고대회에 있던참가하던 [[1989년]] [[8월 19일]] 아버지가 죽었다.<ref name=ma>{{저널 인용|저자=정희상 |날짜=1990-11 |제목=분단조국 그리고 윤석양의 삶 |저널=월간 말 |권= |호=11월 |issn= |url= |형식=월간지 |확인날짜=2012-09-07 }}</ref>
 
운동권학생운동권 생활에 지쳐가던 중 [[1990년]] [[5월 1일]] [[대한민국]]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육군 제3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6주간 훈련을 받고훈련받고 [[1990년]] [[6월 20일]] [[강원도]] [[철원]]의 자대에 배치받아 소대원으로소대원으로서 복무하던 중 [[7월 3일]] 연대 인사과장에게 불려간다. 대공상담소라고 적힌 보안부대에 가서 이승섭계장 계장과이승섭과 김효수반장 반장에게김효수에게 혁노맹[[혁명적 노동자 계급투쟁동맹|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 활동과 다른 조직원의 신상에신상을 대해자백하라고 심문을 받았다심문당했다. 이후 서울후 서울특별시에 있는 서빙고 분실로 옮겨 [[7월 5일]]부터 이승섭계장 계장과 이덕렬이승섭과 부장, 김효수이덕렬과 반장 김효수 등에게 이상재, 정헌, 임찬수 등 군투입자와투입자와 중앙위원 거주지 계속 심문을 받았다심문당했다. 대학교 앞에서 현장 활동을 거쳐 [[보안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편에서 일하기로 신임을 얻고 [[8월 22일]]에는 장자동장자동에 보안사령부로있는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로 이동했다. 다시 서빙고 분실로 다시 와서 보안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 수사3과 분석반에서 김용성 과장 김용성, 이승섭 계장, 이덕렬이승섭, 부장 이덕렬, 박대호, 조재은과 함께 근무하던 중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비롯해 민간인 1,303명의303명을 민간인 사찰사찰한 카드와 컴퓨터 디스켓 3통 등을 가방에 넣어 [[9월 23일]] 새벽에 보안사령부를[[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를 탈출했다.<ref> {{저널 인용|저자=정희상 |날짜=1990-11 |제목=나에겐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다|저널=월간 말 |권= |호=11월 |issn= |url= |형식=월간지 |확인날짜=2012-09-07 }}</ref>
 
== 양심선언 ==
{{본문|보안사[[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사건}}
보안사를[[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를 탈출한 윤석양은 [[한국기독교협의회]]를 찾아가 양심선언문과, 80일간의 보안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체험을 정리했다. [[9월 24일]] 저녁에는 [[언론노보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기관지 〈언론노보〉 기자로 일하던 대학 1년 선배인 양정철에게 전화를전화했고 걸었고,9월 다음25일 서울특별시 [[종로 (서울)|종로종로구]]에서 모처에서 만나 보안사령부에서[[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에서 사찰 자료를 사찰자료를들고 들고나온나온 사실을 밝혔다. 자료를 받은 양정철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사무실에 돌아와 [[권영길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언노련 위원장 [[권영길]] 등 간부들과 심야대책회의를심야에 벌였다대책을 회의했다. [[9월 26일]] 양정철은 [[한겨레]] 경제부에 근무하던 대학 학보사 선배인 이인우기자 기자에게이인우에게 사찰 자료를 건넨다. 기자 이인우는 성유보〈한겨레〉 편집국장에게편집국장 성유보에게 내용을 보고했고, 김종구 경찰청 출입기자출입 기자 김종구, 기자 이인우, 기자, 김성걸 기자, 곽윤섭 사진부 기자로기자 곽윤섭로 특별 취재팀이 구성됐다. 사전 취재를 통해이용해 취재팀은 윤석양의 양심선언 후 서울대학교 근처근처에 모비딕이라는있는 호프집을호프집 모비딕을 위장 운영하던 보안사령부의 사찰 활동을 확인해 보도하게된다보도하게 된다.<ref>{{웹 인용|제목=‘모비딕’의 숨은 또 다른 주인공 |url=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84340.html |날짜= 2011-6-24 |저자=김도형 선임기자 |출판사=한겨레 |확인일자=2012-09-08 }}</ref>
 
윤석양은 [[1990년]] [[10월 4일]] 한국기독교협의회 인권위소속 인권 위원회 사무실에서 보안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내용을 폭로했다. 이로써 당시 정국의 최대 현안이었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의 관철과 국방부 장관 [[이상훈 (1933년)|이상훈]] 국방부보안사령관 장관, 보안사령관이조남풍이 경질되고 보안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명칭을 [[기무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로 바꾸게 했다. 폭로 후 한국기독교협의회의한국기독교협의회에서 보호를 받던보호받던 윤석양은 [[1991년]] 5월 지역 신문사 편집부로 자리를 옮겨 [[1992년]] 3월까지 일했다. 지역신문 기자로 일하던 10개월 동안10개월간 지역 주민들의 삶을생활을 체험하며,체험하면서 민중들의민중의 구체적실제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현실을 체화했다. 기자기자로서 생활을 하던생활하던 중 관공서와 경찰서 등에서 취재를 하기도취재하기도 했다고 한다. <ref> {{저널 인용|저자=양승균 |날짜=1992-11 |제목=윤석양의 수배일기 |저널=월간 말 |권= |호=11월 |issn= |url= |형식=월간지 |확인날짜=2012-09-07 }}</ref>
 
2년여 수배 끝에 [[1992년]] [[9월 23일]] 오후 9시 20분 [[대구시]] 남구 대명10동 1647-7 박서방회집에서 윤석양후원사업회 양승균사무국장 사무국장과양승균과 저녁을저녁 먹던식사를 하던기무사령부와[[국군기무사령부]]와 대구 헌병대 요원 등 7명에게 연행되어강제로 연행당해 군형법상 군무이탈군무 이탈 혐의로 육군 제3보병사단 헌병대에 입창 구속,입창돼 수감되었다구속당했다.
 
{{인용문|2년간의2년 수배생활간의 수배 생활 동안 노동을 통한 건강한 운동적 삶을 살려고 성실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행동에 나서려 할 때마다, 군입대 후 보안사령부의 강요 때문에 몸담았던 학생운동조직의학생운동 조직의 수사에 협조한 기억이 나의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사찰사건을사찰 사건을 폭로 후 2년간 수배생활을수배 하다가생활하다가 기무사령부 요원들에게 연행되기 전}}
 
== 출소 후 ==
[[1994년 10월]] 2년 형기를 마치고 [[공주교도소]]에서 만기출소만기 출소 후 복학하여 학교를 졸업하고, [[상명대학교]]를 자퇴한 반월공단에서 4년간 노동운동을 하며하면서 여공생활을여공으로서 했던생활했던 김미화와 [[1996년]] [[6월 14일]]에 결혼했다혼인했다.
 
== 기타 ==
윤석양의 어머니가 죽고 난 아버지와 결혼했던혼인했던 민인숙은 이후그 후 전 연기군수 [[한준수]] 전 연기군수와 재혼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35573 |날짜= 2005-2-11 |제목=내부고발자 실상 알면 양심선언 못해 |출판사=오마이뉴스 |확인일자=2012-09-08 |저자=심규상 }}</ref>
 
== 작품 ==
* 2011년 박인제가 감독한 영화 모비딕(박인제 감독)의 실제 주인공
 
== 주석 ==
익명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