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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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양'''(尹錫洋, [[1966년]] ~ )은 [[1990년]] [[10월 4일]] 당시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 신분으로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보안사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불법 사찰 내용]]을 [[양심선언]]해서, 그해 가을 [[노태우 정권]] 퇴진 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사람이다공익 제보자다.
 
== 생애 초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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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운동권에서 적극으로 활동하여 [[1988년]]에는 CA 그룹 학생회장 후보 선거운동본부 조직국장, [[혁명적 노동자 계급투쟁동맹|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혁노맹)의 전신인 “혁명의 불꽃” 그룹 선동국장을 맡기도 했다. [[경기도]] 소래 ‘작은자리’에서 일주일간 개최된 [[혁명적 노동자 계급투쟁동맹|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 결성 대회에 참가하던 [[1989년]] [[8월 19일]] 아버지가 죽었다.<ref name=ma>{{저널 인용|저자=정희상 |날짜=1990-11 |제목=분단조국 그리고 윤석양의 삶 |저널=월간 말 |권= |호=11월 |issn= |url= |형식=월간지 |확인날짜=2012-09-07 }}</ref>
 
학생운동권 생활에 지쳐가던지쳐 가던 중 [[1990년]] [[5월 1일]] [[대한민국]] 육군 현역병으로 입대했다. 육군 제3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6주간 훈련받고 [[1990년]] [[6월 20일]] [[강원도]] [[철원]]의 자대에 배치받아 소대원으로서 복무하던 중 [[7월 3일]] 연대 인사과장에게 불려간다. 대공상담소라고 적힌 보안부대에 가서 계장 이승섭과 반장 김효수에게 [[혁명적 노동자 계급투쟁동맹|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 활동과 다른 조직원의 신상을 자백하라고 심문당했다. 그 후 서울특별시에 있는 서빙고 분실로 옮겨 [[7월 5일]]부터 계장 이승섭과 부장 이덕렬과 반장 김효수 등에게 이상재, 정헌, 임찬수 등 군 투입자와 중앙위원 거주지 계속 심문당했다. 대학교 앞에서 현장 활동을 거쳐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편에서 일하기로 신임을 얻고 [[8월 22일]]에는 장자동에 있는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로 이동했다. 서빙고 분실로 다시 와서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 수사3과 분석반에서 과장 김용성, 계장 이승섭, 부장 이덕렬, 박대호, 조재은과 함께 근무하던 중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비롯해 민간인 1,303명을 사찰한 카드와 컴퓨터 디스켓 3통 등을 가방에 넣어 [[9월 23일]] 새벽에 [[국군기무사령부|국군보안사령부]]를 탈출했다.<ref> {{저널 인용|저자=정희상 |날짜=1990-11 |제목=나에겐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다|저널=월간 말 |권= |호=11월 |issn= |url= |형식=월간지 |확인날짜=2012-09-07 }}</ref>
 
== 양심선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