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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년에 수도를 나라의 헤이조쿄로 천도하였다. 헤이조쿄는 중국의 수도 [[장안]]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도시로, 공무원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치도시였다. 헤이조쿄로 천도하는 데는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헤이죠코 천도에 앞서 선정되고 시행된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일본국내의 실정에 맞게 여러 방면에서 검토하고 수정하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율령국가]], 천황중심의 [[전제국가]],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하던 시대였다.<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지리/세계의 여러 나라/아시아/일 본#일본의 역사|일본의 역사]]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7세기 후반에는... 천황을 정치적·종교적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의 율령국가(律令國家)가 형성되었다. }}</ref> 율령국가라는 성격은 [[호적]]과 [[계장]](計帳)으로 인민을 파악하고, [[조용조]]와 군역을 부과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다이호 율령은 이후에 [[후지와라노 후히토]] 등에 의해 누차 손질되어오며 [[10세기]]까지 일본에서 최고 법전의 지위를 유지한다.<ref name="구태훈">구태훈 (2009), 《일본사 파노라마》</ref> {{Rp|56}}
 
이 시기에는 대외적으로는 [[신라의 대외 관계|신라]]·당과의 통교를 긴밀하게 하는 한편, 727년에는 [[발해]]와도 국교를 열었다.<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꺾쇠표 = 예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55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 = 대외적으로는 신라·당과의 통교를 긴밀하게 하는 한편, 727년에는 발해와도 국교를 열었다. }}</ref> 특히 [[견당사]]를 자주 파견하여 [[당나라|당]]을 비롯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전국에 [[고쿠분지]](国分寺)를 세워, 불교적인 성격의 [[덴표 문화]](天平文化)가 번성하였다. [[고지키]], [[니혼쇼키]], [[만요슈]]같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문학]]작품이 등장했다. 이 시대에는 중앙에서 전쟁이 많이 발생하였고, [[도호쿠]]에서는 [[에조]](蝦夷)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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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은 당의 율령체제를 모방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701년, [[다이호 율령]]) 천황중심의 일본식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외이념을 표방하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藩國)으로 간주하는 야량자대(夜郞自大)적인 태도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서기]]》등이 편찬(720년)되면서 소위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설이 조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당시에 상승일로의 국세에 있던 신라로서는 이런 일본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고 720년 경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기 시작했다. 또한, 일본의 무례한 태도도 도를 넘어 급기야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강요하다가 추방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라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다가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7세기 후반에 설치된 [[다자이후]]는 신라와 당나라 등 외국 사신들이 입국할 때 외교 절차를 거치던 곳인데, 《[[속일본기]]》에는 이곳에 온 신라 사신들을 그냥 돌려보낸 몇 차례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신을 돌려보낸 이유에 대해 일본은 신라가 믿음이 없고 예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8세기, 신라와 일본 사신의 외교 마찰은 심각했다. 신라로 간 일본 사신들도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기가 수 차례, 서로 쫓아내고 쫓겨나는 외교분쟁이 끊임없이 불거졌다.<ref name="ReferenceA">{{서적 인용 |저자=KBS역사스페셜 |제목=역사스페셜6|꺾쇠표= 예 |연도= 2003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 8986361841|쪽= 16 |인용문 = 다자이후는 신라와 당나라 등 외국 사신들이 입국할 때 외교 절차를 거치던 곳이다. 『속일본기』에는 이곳에 온 신라 사신들을 그냥 돌려보낸 몇 차례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신을 돌려보낸 이유에 대해 일본은 신라가 믿음이 없고 예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8세기, 신라와 일본 사시의 외교 마찰은 심각했다. 신라로 간 일본 사신들도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기가 수 차례, 서로 쫓아내고 쫓겨나는 외교분쟁이 끊임없이 불거졌다. }}</ref>
 
이러한 대립 무드는 성덕왕 후반에 이르러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해동제국기|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는 성덕왕 19년([[720]])에 신라가 일본의 서쪽 변방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21년([[722년]]) [[음력 10월|10월]]에 모화군(毛火郡)에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관문으로 삼고, 일본의 적들의 길을 막았다. 성의 둘레는 6,792보(步) 다섯 자에 동원된 역도(役徒)는 39,262인이었으며, 책임자는 원진(元眞) 각간이 맡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유사]] | 저자= [[일연]] |꺾쇠표 =예|연도= 1281 |장= [[:zh:s: 三國遺事/卷第二#孝成王|권2 기이 효성왕]] |인용문= 開元十年壬戌十月。始築關門於毛火郡。今毛火村。屬慶州東南境。乃防日本塞垣也。周迴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役徒三萬九千二百六十二人。掌員元真角干。開元二十一年癸酉。唐人欲征北犾。請兵新羅。客使六百四人來还國 (효성왕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 (毛火郡)에 관문(關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 (毛火村)으로 경주 (慶州)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 (日本)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천 7백 92보 5자 이고, 동원된 역부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掌員)은 원진 (元眞) 각간(角干) 이었다. ) }}</ref><ref group="주해">개원(開元)은 당 현종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 ({{웹 인용 |url=http://www.history.go.kr/url.jsp?ID=NIKH.DB-sy_002r_0010_0060_0010 |출판사= 국사편찬위원회 | 제목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삼국유사 |인용문 = 譯註 002 당 현종의 연호로 이때는 성덕왕 21년(722)이다. ≪삼국사기≫ 권8 성덕왕 21년 10월의 기록(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과 일치하므로 효성왕대의 일이 아니라고 보인다.}})</ref><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8|본기 권8 성덕왕]] |인용문= 二十一年 …冬十月 …築毛伐郡城 以遮日本賊路 (21년(722) …겨울 10월에 … 모벌군성(毛伐郡城)을 쌓아 일본 도적들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ref> 이는 경주의 동남쪽 경계였다. 30년([[731년]])에는 동쪽 해안으로 쳐들어온 일본의 병선 300척을 격퇴하고,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8|본기 권8 성덕왕]] |인용문= 三十年 …日本國兵船三百艘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秋九月 命百官會的門 觀射車弩 (30년(731)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가을 9월에 백관에게 명하여 적문(的門)에 모여 수레 쇠뇌[車弩] 쏘는 것을 관람하도록 하였다.) }}</ref>
 
==== 일본의 신라 정벌 계획 (742년~)====
 
양국간의 극한의 대립은 신라의 [[경덕왕]]대(742년 ~ 765년)이자 일본의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집권기에 절정에 달해 있었다. 경덕왕 원년(742년) 10월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고,<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9|본기 권9 경덕왕]] |인용문= 元年 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원년(742)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ref> 753년 8월에도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9|본기 권9 경덕왕]] |인용문= 十二年 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12년(753)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ref> [[755년]] 당시에 아시아의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에 [[안사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란이 발발했다. 이로 인해 당나라가 외부에 눈을 돌릴 틈이 없게 되자 이틈에 일본은 당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 신라를 도모할 궁리를 했고 이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본인의 정치적 야심과 맞물려 진행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KBS역사스페셜 |제목=역사스페셜6|꺾쇠표= 예 |연도= 2003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 8986361841|쪽= 18 |인용문 = 일본이 762년을 침공 원년으로 삼은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더 있었다. 당시 신라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당이 ‘안사(安史,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으로 심각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무려 10년이나 계속된 난으로 당은 국제 정세에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여력이 없었다. 바로 이때 신라를 공격한다면 신라의 우방인 당나라도 돕지 못할 것이라는 일본 나름의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일본이 신라를 침공해야 했던 내부적인 원인이 있었다. 일본 정계를 흔들던 한 인물의 야망 때문이었다. }}</ref>
 
이에 당시에 신라등의 외국과의 외교를 관장하는 관청인 [[다자이후]]에서 신라정벌을 목적으로 태제부조행군식(太宰府造行軍式)이라는 세부적인 계획안을 마련해 이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756년]] 일본조정은 북 큐슈에 [[이토 성]](怡土城)을 축조했다. 여러가지 축조기술을 동원해 견고히 건설된 성은 근방에 주선사(主船司)라는 관청과 용광로와 무기제조공장을 세우는 등 대규모의 병참기지로서 기능했다.
 
[[759년]]에는 3년후인 [[762년]]을 기한으로 [[호쿠리쿠도]]{{.cw}}[[산인도]]{{.cw}}[[산요도]]{{.cw}}[[난카이도]] 4도에 할당량을 제시해 500척의 전함을 건조하도록 지시한데 이어 [[761]]년에는 [[미노 국]](美濃國){{.cw}}[[무사시 국]](武藏國)에서 20명씩의 소년을 징발해 신라어 교육에 들어가는 등 준비는 유래가 없을 만큼 대규모적으로 진행되어 갔다.<ref>{{서적 인용 |저자=서영교 |제목= 신라인 이야기 |꺾쇠표= 예 |연도= 2009 |출판사=살림 |위치=|id=ISBN 9788952210739 |쪽= 204~205 |인용문 =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파병 규정(행군식)을 만들고 여러 지방에 명령을 내려 3년 동안 500척의 병선을 건조하도록 하는 등 신라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761년에는 미노와 무사시 두 지역의 소년 40명에게 신라말을 배우게 했고, 그 후에도 여러 지방에 절도사 체제를 강요하고 전투에 대비하도록 했다. }}</ref>
 
안사의 난을 정점으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신라도 중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혼란스러운 정치{{.cw}}경제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임관군|모벌성]](毛伐城)에 노당(弩幢)을 증원하는 등 준비를 갖추었다. 경덕왕 대에는 군을 중앙의 6기정(六畿停)과 지방의 9주정(九州停)으로 재편하는 등 신속한 군대동원을 위한 군제개혁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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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지속 ====
한편, 무역에 있어서는 신라와 왜가 긴밀하게 통교하였다.<ref name="ReferenceB">{{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꺾쇠표 = 예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55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 = 대외적으로는 신라·당과의 통교를 긴밀하게 하는 한편, ...}}</ref> 통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은 일본의 사절단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이루어졌는데, 사절단의 공무역은 대당무역에 비해 빈번하지 않았다. 사절단 일행은 최대 수백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중에는 다수의 상인도 포함되어 이들에 의한 사무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공무역은 주로 사절단이 건너 와서 예물을 바치면 후대해서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사절단이 무례한 행위를 할 경우 접견을 거부하고 돌려 보내기도 하였다. [[쇼소인]]에 남아 있는 보물을 통해, 신라와 나라 시대의 일본이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관된 보물 중에는 신라의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이 있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ref name="ReferenceC">{{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꺾쇠표 = 예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61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 = 정창원 … 특히 신라와 일본의 교류가 활발해 신라의 물건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의 예를 들면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 다양하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 }}</ref>
7세기 후반에 설치된 [[다자이후]]는 신라와 당나라 등 외국 사신들이 입국할 때 외교 절차를 거치던 곳이다. 《[[속일본기]]》에는 이곳에 온 신라 사신들을 그냥 돌려보낸 몇 차례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신을 돌려보낸 이유에 대해 일본은 신라가 믿음이 없고 예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8세기, 신라와 일본 사신의 외교 마찰은 심각했다. 신라로 간 일본 사신들도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기가 수 차례, 서로 쫓아내고 쫓겨나는 외교분쟁이 끊임없이 불거졌다.<ref name="Referenc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