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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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 천도의 배경 ===
1392년에 개경([[개성]])에서 조선왕조를 세운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면목과 인심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을 하였다.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는 군주인 이성계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태조는 한시라도 빨리 옛 왕조로부터 벗어나고 새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새 왕조가 하늘의 명을 받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정당하게 세워졌음을 세상에 널리 강조하였다. 태조가 천도를 한 이유로는 기존 세력의 근거지인 [[개경]]에 대한 정치적 불안과 심리적 갈등, 그리고 풍수 지리설의 영향, 민심의 쇄신 등을 들 수 있다.<ref>{{저널 인용 | 저자 = 김용국 | 날짜 = 1957 | 제목 = 서울 천도의 동기와 전말 | 저널 = 향토서울 | volume = 1 |꺾쇠표=예 }}</ref><ref>{{저널 인용 | 인용 = | 저자 = 이원명 | 날짜 = 1984 | 제목 = 한양 천도의 배경에 관한 연구 | 저널 = 향토서울 | volume = 42|꺾쇠표=예 }}</ref><ref>{{저널 인용 | 인용 = | 저자 = 임덕순 | 날짜 = 1984 | 제목 = 한양이 수도로 선정된 이유 | 저널 = 충북대학교 논문집 | volume = 27|꺾쇠표=예 }}</ref><ref>{{저널 인용 | 인용 = | 저자 = 원영환 | 날짜 = 1988 | 제목 = 한양 천도와 수도건설고 | 저널 = 향토서울|꺾쇠표=예 }}</ref> 새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무학|무학국사]]와 [[하륜]](河崙) 등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1393년에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1394년 11월 21일(음력 10월 28일)에 [[한양]]으로 천도(遷都)를 하였다. 천도의 기준은 [[풍수]]·[[도참설]]에 따르면서, 남쪽에 한강이 있어 교통상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기가 편리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ref name="글로벌">{{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2|제목=[[: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서울특별시/서울의 연혁#조선시대의 서울|조선시대의 서울]]}}</ref>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에 천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편 [[풍수]]·[[도참설]]에 능했던 [[하륜]]에 따르면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자리인 무악 일대가 명당이었고, 이로 인해 수도의 위치에 대해 크게 논의가 일기도 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러한 논거로 수도의 입지를 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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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 ==
조선 시대의 한성부의 구역은 오늘날의 서울보다 훨씬 협소하였다. 동쪽의 [[낙타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북악산|백악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그 터전으로서, 성 밖의 일부 지역도 관할했지만, 원칙적으로 성 안의 구역만을 한양이라 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손정목 |제목=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 |꺾쇠표= 예 |연도=1977 |출판사=일지사 |쪽=35 }}</ref>
 
== 관청으로서의 한성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