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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신라의 역대 국왕|신라의 제32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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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왕'''(孝昭王, [[687년]] ~ [[702년]] [[8월 24일]](음력 7월 27일), 재위: [[692년]] [[8월 20일]]([[음력 7월 3일]]) ~ [[702년]] [[8월 24일]]([[음력 7월 27일]]))은 [[남북국 시대]]의 [[남조|남국]]인 [[신라]]의 제32대 [[왕]]이다. [[피휘|이름]]은 이홍(理洪, 후에 이공(理恭)으로 개명). [[신문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이다. [[691년]]에 태자가 되었고, [[692년]] [[음력 7월]]에 부왕 신문왕이 붕어하여 왕위에 올랐다. [[692년]]부터 [[702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모후인 [[신목왕후]]가 [[섭정]]하였다. <ref name="효소왕">국어국문학자료사전(만파식적설화, 1998년, 한국사전연구사 편집) 참조</ref><ref name="신라효소왕">{{서적 인용|저자=일연 글, 조은실 그림, 국사교육교재개발원 역|제목=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요술피리 만파식적|꺾쇠표= 예|연도=2011|출판사=킹덤하우스|ISBN=9788993155310}}</ref>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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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신문왕]] 때(682년) 어느날 동해바다에서 [[감은사]] 앞으로 섬이 떠내려오면서 두 개로 갈라졌다 합했다 했다. 왕이 그 섬에 올라 용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용은 신문왕에게 흑옥대를 바치고 섬의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국가의 안녕을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 왕이 그 말을 따라 만파식적 피리를 만들었다.
 
당시 문무왕릉에서 동북쪽으로 10km10&nbsp;km 떨어진 곳에 소용돌이치는 소가 있고 여기 큰 바위섬이 있다가 지금은 가라앉았다고 하는 그곳 감포 앞바다에는 원래 섬이 12개 있었다고 한다. 그 많은 섬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고 대왕암이라는 바위만 남아 있다.
 
[[신문왕]] 일행은 [[기림사]] 뒤 함월산으로 해서 월성으로 돌아간다. 이때 왕의 수레는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갔다. 대궐에 있던 태자 이공(후일의 효소왕)이 옥대와 만파식적 보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신문왕을 맞으러 서라벌에서 말을 달려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용의 비늘로 된 옥대의 띠판을 하나 끌러 물에 담갔다. 그랬더니 띠판에 새겨진 용이 살아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하늘로 올라갔다.
 
이후 백성들은 이 이야기를 아름답게 새기고 기림폭포아래 용연을 아꼈다. 통일신라의 전후세대들은 전쟁을 예술의 경지로 변화시켜 칼 대신 만파식적이라는 피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보면 태자 이공이 등장하기 이른 때였지만 월성에서 태자같은 누군가 기쁘게 마중나왔을 것은 분명하다. 현재 경주박물관에는 오래된 옥피리가 보존돼 있다. <ref name="효소왕"/><ref name="신라효소왕"/>
 
== 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