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고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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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 정책 ===
==== 백제 공격 ====
처음에는 부황의 정관의 치를 이끌었던 유능한 가신들을 옆에 두고 대외적으로도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백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조공하는 [[신라]]를 계속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신을 백제에 보내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는 강압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제동맹]] 당시 신라가 백제를 먼저 배신했으며 또한 자신의 왕인 [[백제 성왕|성왕]]을 죽였다는 이유를 말하며 당은 이에 간섭하지 말라는 엄포를 내린다.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당나라에 조공을 하는 신라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의 무역 중심지인 당항성을 함락시켜 조공길을 막았다.([[643년]]). [[651년]],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자 고종은 백제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28|본기 권28 의자왕]] |인용문= 十一年 遣使入唐朝貢 使還 高宗降璽書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並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俎 築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歲高句麗·新羅等使並來入朝 朕命釋玆讎怨 更敦款睦 新羅使金法敏奏言 高句麗·百濟脣齒相依 竟擧干戈 侵逼交至 大城重鎭並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並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古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齊桓列土諸侯 尙存亡國 況朕萬國之主 豈可不恤危藩 王所兼新羅之城 並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俘虜 亦遣還王 然後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埸 耕織並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哉 王若不從進止 朕已依 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句麗 不許遠相救恤 高句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藩度遼 深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 (11년([[651년]])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당나라 고종이 조서[璽書]를 내려 왕을 타일러 말하였다. 『해동(海東)의 삼국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며, 경계를 나란히 하나 땅은 실로 들쭉날쭉하다[犬牙]. 근대 이래로 마침내 의혹과 틈새가 생겨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서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고, 마침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과 도마[刀俎] 위에 올려놓게 하고, 무기를 갖고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서로 이어졌다.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심히 긍휼히 여기고 민망해 하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함께 와서 조공하자 짐은 이러한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을 돈독히 하도록 명령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빨[脣齒]과 같이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략하니 큰 성과 중요한 진(鎭)들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되어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아울러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곧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쳐서 빼앗을 것이되 다만 옛 땅을 얻으면 곧 서로 화호를 청할 것입니다.’ 짐은 그 말이 순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망한 나라를 존속시켰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임금으로 어찌 위기에 처한 번국(藩國)을 구휼하지 않으리요. 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은 모두 마땅히 그 본국에 돌려줄 것이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의 포로들을 또한 왕에게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환난을 풀고 분규를 해결하고,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전쟁을 그치면 백성은 짐을 내려 어깨를 쉬는 소원[息肩之願]을 이루게 되고 세 번국들은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다. [이는] 저 변경의 부대에서 피를 흘리고 강토에 시체가 쌓이고 농사와 길쌈이 모두 폐(廢)하게 되어 사녀(士女)가 의지할 것이 없게 된 것과 어찌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나아가고 머무는 것[進止]을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이미 법민(法敏)이 청한 바대로 왕과 승부를 결정하도록[決戰] 내맡길 것이고, 또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즉시 거란(契丹)과 여러 번국(蕃國)들로 하여금 요하(遼河)를 건너 깊이 들어가 노략질하게 할 것이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할 것이며, 좋은 계책을 살펴 도모하여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ref> 그러나 백제를 이를 간단히 무시한다. 오히려 신라의 [[김춘추]](태종 무열왕)가 [[654년]] 신라의 왕위에 오르자 신라의 정세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백제와 고구려는 [[655년]] 정월 신라를 대대적으로 협공하여 33개의 성을 함락시켜 수도인 금성까지 위협한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 부터 자신을 방어해 줄 구원군을 당나라에 정식으로 요청한다. 그러나 당 고종은 백제를 공격하기에 아직 시기가 이르다 판단하고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백제의 [[의자왕]]이 계속된 전쟁의 승리로 도취한 나머지 군사방비를 소홀히 하자, 고종은 백제의 세력이 미약해졌다 판단하고 [[660년]] 3월[[소정방]]에게 13만 군사를 주어 백제를 멸망시키도록 지시한 뒤, 백제의 동맹국인 고구려에서 구원병 보내는 것을 막기위해 [[이세적|이적]]에게 고구려 국경지역인 요하에 군사를 배치시켜 고구려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신라 또한 [[김유신]] 5만 군사를 보내 협공하도록 했다.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28|본기 권28 의자왕]] |인용문= 六月… 高宗詔 左武衛大將軍蘇定方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左驍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 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嵎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여 와서 정복하게 하고, 아울러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그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세력을 합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 서쪽의 덕물도(德物島)에 일리네어 신라 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 방면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 }}</ref>
 
한편 백제의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방비를 소홀히 하여 전쟁에 젼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신라-당 연합군 18만 명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귀향 생활중인 [[흥수]]에게 막는 방법을 모색하게 했고 [[흥수]]는 백제의 천혜의 요새인 백마강과 탄현지방에 군사를 배치하여 당나라와 신라군을 막으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간신 중 한 명인 달솔이 흥수를 시기하여 "당나라 군과 신라군을 백마강과 탄현을 넘어오게 한 뒤 협공"하자고 제안을 해 의자왕이 달솔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실수를 하고 만다. 이러한 실수는 곧 패배로 이어져 백제는 군사 3만여 명을 잃고만다. 이 참담한 결과로 좌절에 빠진 의자왕은 [[계백]] 등 출정장수에게 남은 군사 1만 명 중 5천의 군사를 주어 결사항전하도록 했지만 수적 열세에 패배해 모두 전멸했고 자신은 웅진성으로 달아나 남은 5천 명의 군사로 대항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결국 [[660년]] 7월 18일 항복을 선언한다. 그리고 의자왕을 포함해 왕족, 귀족, 일반 백성 등 13만 명의 포로는 당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