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다 스나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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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되어, 이후 통산 15번 당선되었고, 민주당 야당파로서 기타무라 도쿠타로(北村徳太郎),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과 행동을 같이하였다. 동향 구마모토 출신의 오아사 타다오(大麻唯男)에게 사숙, 개진당과 일본 민주당을 거쳐서 [[자유민주당]] 창당 후 [[고노 이치로]](河野一郞)를 보필하였고, [[하토야마 내각]]에서 외무 정무차관으로 재직했다.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는 보수 본류 정권하에선 소외를 면치 못했지만, 1965년부터 중의원 부의장으로 건국 기념일 제정에 진력한데다, 정계 입문 이래 장기간 각료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이 참작된 가운데 1967년,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내각]]에 후생대신으로 기용되어 입각했다. 현직 후생대신으로선 처음으로 [[미나마타 시]]를 직접 방문해 [[미나마타 병]]의 피해자들에게 사죄했으며, 미나마타병을 [[공해 (환경)|공해]]로 인정하였다.
 
1968년, 모리 기요시(森淸)의 죽음을 받아 모리파인 춘추회(春秋會) 회장에 취임해 소노다파(園田派)를 이끌었다. 이 무렵부터 [[후쿠다 다케오]]를 전면 지지, 1972년 각복결전(角福決戦)의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경선에서 후쿠다를 지원했다. 총재 선거 후, 소노다파를 해산하여 후쿠다파에 들어가 회장 대행을 지냈다. 1976년, 반(反) 미키(三木) 연합에 의한 그룹 거당협(挙党協)의 후쿠다파 대표로 '미키 끌어내리기(三木おろし)'의 최전선에 섰다. 그 활약이 있어서 [[후쿠다 내각]]에선 염원이었던 [[내각관방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종래 후쿠다파 요인들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해당 파벌의 '프린스' [[아베 신타로]]의 관방장관 취임은 빠질 수 없어 방계인 소노다는 개조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사실상 좌천당했다. 소노다 본인은 관방장관 유임을 희망했기 때문에 결국 이 사건으로 후쿠다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들어 갔다.
 
적극적인 대중(對中)관계 개선론자였던 소노다는 외무대신으로서 1978년,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해 중일 양국간의 공식적인 전쟁 상태를 완전히 종결지었고, 세계 각지를 순방해 전방위 외교를 전개하는데 주력했다. [[제1차 오히라 내각]]에서도 외상으로 유임되었으며, 1979년 40일 항쟁에서는 후쿠다가 아닌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수상 지명전 투표를 던짐으로써 후쿠다파에서 제명당한 채 무파벌로 남게 되었다. 1980년, 제2차 오일 쇼크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일본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외무성 특사로 중동과 인도에 파견되었고, [[스즈키 내각]]에서 다시 후생상으로 입각하였다. 이듬해 미일 동맹에 관한 해석 불일치로 사임한 [[이토 마사요시]]의 후임으로 재차 외무대신을 맡으면서 대한(對韓) 경협 교섭에 강경한 자세로 임했다. 1984년, 당뇨병 악화에 따른 급성 [[신부전]]으로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