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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권의 장악 ===
 
환온은 [[후조|후조(後趙)]]가 [[염위|염민(冉閔)]] 의해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는혼란한 틈을 타 북벌을 결행하였지만결행했지만 [[354년]] [[전진|전진(前秦)]]의 정복엔 실패했다. 다만 [[356년]]에 은호의 군대를은호를 격파했던꺾었던 요양(姚襄)의 군세를 격파, 동진이 아직 [[서진|서진(西晋)]]이던 시절<ref>[[서진|서진(西晋)]]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난 것이 동진(東晉)이다. 그래서 동진 사람은 누구나 원래 고향을 수복하고 싶어했고 중국의 재통일을 원했다.</ref> 구(舊) 도읍인 [[뤄양 시|낙양(洛陽)]] 수복하는데까진수복까진 성공하였다성공했다. 환온은 동진의 원래 도읍인 낙양으로 천도할낙양 것을천도를 주장하였지만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수비대만 남기는 것으로 결정났다. 천도가 무산된 이유는 당시 낙양은 동진의 변경에서 너무 가까웠고 그 근방의 치안이나 안전이 전혀 담보돼있지담보돼 있지 않았기 때문인데, 실상 환온 자신조차 천도 제안이천도가 받아들여질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다. 단지 자신의 공적을 조정에 확인시키고 입지를 더욱 다지고자 협상 카드의 하나로 꺼냈을 뿐이다라고 생각되고 있다. [[전진|전진(前秦)]]을 침공시재침공 저명한 군사전략가로써 명성을 떨쳤던 적장 [[왕맹|왕맹(王猛)]]<ref>[[전진|전진(前秦)]]의 세조(世祖)는 [[왕맹|왕맹(王猛)]]을 등용하여 화북을 통일할 수 있었다. 화북의 헤게모니를 두고 다퉜던 [[전연|전연(前燕)]]과의 세력타툼에서 늘 불리했었는데 이를 한 번에 뒤엎고 화북을 통일했으며 전진(前秦)은 왕맹을 통해 최대 판도를 자랑할 수 있었다.</ref> 의 배반을영입에 꾀해실패하는 전황의 반전을결국 노렸지만 실패했다철수했다.
 
동진의 숙원이었던 북벌을 일부나마 실현시킨 환온은 귀국후 그 공으로 [[중국의 재상|대사마(大司馬)]] 겸 대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에 올라 [[364년]]에 이미 갖고 있던 형주자사에서 양주자사(揚州刺史)<ref>동진의 수도 낭야(琅邪) 근처의 모든 병권을 갖게됐다는 뜻.</ref> 로 전임됐고 [[369년]]에는 연주자사 겸 서주자사를 아예 겸하게 되어더해 [[양쯔강]] 하류의 모든 영역의 군세를 수중에 넣었다. 여기에 자신의 정예 군세인 서부군단을 합쳐 동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장악했다. 또한 친구이며 동진의 명문 귀족 유담(劉淡)이 가세했다.
 
동진은 [[화북|화북 지방]]으로부터의 유민(流民)과 [[화중]], [[화남]]의 원주민이 섞여 건국된 나라였다. 그러나 동진으로 유입되는 유민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호구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제대로 파악이 안돼서안돼 조세나 병역의 부과가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환온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현재 거주지를 중심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하는 정책을 실시하는데 이를 토단(土斷)이라 하였다한다. 동진의 이후 약 100년 역사동안 토단은 약 아홉 차례 기록돼있고기록돼 있고 환온이 대사마로대사마 재직할 때재직시 가장 거국적으로 실행됐다. 이를 바탕으로 동진의 국력은 엄청나게 확대될 수 있기도 했다있었다.
 
=== 만년(晩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