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쓰나노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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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겐로쿠 11년([[1698년]]) 6월, 시오노 비사문당({{lang|ja|塩野毘沙門堂}})과 젠린 사({{lang|ja|禅林寺}})의 문수당({{lang|ja|文殊堂}}) 등 신사, 사찰의 대수리, 앞서 서술된 학문소와 [[요네자와 성]] 혼마루 고쇼인({{lang|ja|御書院}}), 니노마루의 고부타이({{lang|ja|御舞台}}), 아자부의 저택 신축 등 건설 사업과 [[산킨코타이]]를 화려하게 하였고, 호화로운 [[노 (연극)|노]] 예능을 행하는 등의 사치로 인해, 영지 감소로 어려워진 번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때문에 번의 군용 자금을 일반 재정에 유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런 재정 상태로 기라 가문을 원조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 충신장아코 사건 ==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에도 성]] 내에서 기라 요시히사가 [[아코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에 의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쓰나노리는 친어머니 도미코를 저택으로 모셔갔다. 이듬해인 15년([[1702년]]) 12월 14일, 아코 번의 번사들이 기라의 저택을 습격하는 [[아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쓰나노리는 아버지에게 원군을 보내려 하였으나, [[하타케야마 요시야스]](畠山義寧)가 [[로주]]로부터 출병 중지 명령을 전달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지하였다. 하지만 이 사정을 모르는 일반 서민들은 아코 번사들의 침입 이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요네자와 번의 태도를 비난했고, 우에스기 가문의 명성은 추락했다.
 
== 말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