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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本貫)은 [[족보#용어|시조]](始祖)의 관향, 곧 [[고향]]을 뜻한다뜻한며, 본적(本籍), 본(本), 관향(貫鄕)이라고도 부른다. 어느 한 시대에 정착했던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내는 공간상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성씨|성]]이 같고 본관이 같으면, 부계 친족의 친밀성이 높아진다. [[한국]]의 본관제도는 성씨와 함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며, 본격적으로 정착된 시기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로 여겨진다.<ref name='ksh'> {{뉴스 인용 |저자=김성회 |제목=<nowiki>[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 성씨와 본관</nowiki> |url=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1/03/15/20110315004551.html |뉴스=세계일보 |출판사= |위치= |날짜=2011-03-15 |확인날짜=2016-01-09 }} </ref>
 
== 특징 ==
 
본관제도는 처음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를 나타내었는데, 예컨대, 안동김씨 ○○이라고 하면 안동 출신의 김○○였다.<ref name='ksh' />
 
처음에는 출신지를 나타내던 본관이 점차 사람의 신분 및 집안을 나타내는 이름이[[이름]]이 되었다. 즉, 본관이 씨족의 발상지뿐 아니라, 그 씨족(동본)의 집단적 신분까지 나타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같은 성씨가 너무 많고, 또 같은 성씨에서도 시조나 성씨의 탄생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성씨(金氏)가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나 되고, 몇 개의 성씨(金, 李, 朴, 鄭, 崔 등)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다보니차지하니, 성씨를성씨와 가지고이름만으로는 신분을각각의 개인을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이다되었다. 혈통관계와 신분질서의 징표로 성씨보다는 본관이나 족보의 중요성이 증대된커져 것이다갔다.<ref name='ksh' />
 
이러한 이유로 유래지인 중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본관이 한국에서는 널리 쓰이게 되었다.
 
== 유래 ==
◇대전 뿌리공원에 설치된 청주한씨 조형물. 청주한씨는 고조선 기자로부터 계출된 마한 왕조의 후예로서 단일 성씨로는 네 번째가 되는 명문거족이다.
본관제도의 출발은 중국이다.<ref name='ksh' /> [[주나라]] 시대 [[봉토]]를 제후에게 하사하고, [[사성정책]]을 쓰면서 “○○지역 ○○○”이라는 표식이 나타난다.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지만, 그 사람이 태어난 곳에 따라 “○○지역 ○○○”이라는 식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한자 성씨의 정착에 영향을 미친 [[당나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시이것이 말해,한국에서 사람의 출신지를 뜻하던 본관이 씨족의 발상지로 변한 것이다변하였다. 이렇게 정착된 본관제도는 어느 측면에서 보면, 성씨보다 더 중요한 구실을 하고하는 측면도 있다. 특히 하나의 성씨가 많은 인구를 형성하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성씨는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본관은 혈통과 신분를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김씨’라는 것보다 ‘어느 김씨’라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성씨를 보면서 외국 사람들이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본관제도라고 한다.
사실 본관제도의 출발은 중국이었다. 주나라 시대 식읍을 제후들에게 하사하고, 사성정책을 쓰면서 ○○지역, ○○○이라는 표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시대에 따라 변천하였지만, 그 사람이 태어난 곳에 따라 ○○지역 ○○○이라는 식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한자 성씨의 정착에 영향을 미친 당나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쓰면서 ○○지역 ○○○으로 쓰게 되었고, 점차 씨족의 발상지를 나타내는 것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태어난 곳과 상관없이 안동김씨 ○○이라는 식으로 굳어진 것이다.
 
== 성립 ==
다시 말해, 사람의 출신지를 뜻하던 본관이 씨족의 발상지로 변한 것이다. 이렇게 정착된 본관제도는 어느 측면에서 보면, 성씨보다 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특히 하나의 성씨가 많은 인구를 형성하는 상황에서 성씨는 수식어에 지나지 않는 반면에 본관은 혈통과 신분를 파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김씨’라는 것보다 ‘어느 김씨’라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성씨를 보면서 외국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본관제도라고 한다.
 
보통 시조의 본적지를 본관으로 표기해 왔으나, 시조의 본적지를 본관으로 표기하지 않는 성씨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외국으로부터 전래된 몇몇 성씨는 시조의 본적지보다는 씨족의 발상지를 본관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또한 왕으로부터 성을 받을 때(사성) 본관도 함께 받은 사례가 많아, 시조의 본적지와 본관이 다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본관은 씨족의 발상지로 봐야 타당하다.<ref name='ksh' />
 
현재 우리나라에는 286개 성씨와 4179개 본관이 파악되고 있다([[통계청]] 2000년 인구센서스). 본관도 주요 성씨와 마찬가지로 거대 씨족으로 몰리는 경향이 뚜렷해서 김해 김씨가 9.0%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밀양 박씨 6.6%, 전주 이씨 5.7%를 차지한다. 반면 1000명 미만의 본관도 66%가 넘고, 1985년 이후 새로 만들어진 본관도 [[한양 강씨|한양 강(姜)씨]], [[장지 김씨|장지 김(金)씨]] 등 15개 성관(姓貫)이나 된다.<ref name='ksh' />
 
한국의 본관은, 삼국유사의 신라 6부족을 예로 들며, [[신라]]시대부터 본관이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씨족 시조의 태생(본적)을 거론하며 드는 예로 볼 뿐이고, 한국의 본관제도가 시작된 때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지방 호족들이 발흥을 하면서부터라는 설이 정설이다. 즉, 신라 말에 중앙집권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호족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며 지배권을 확립하고, 그것이 성씨제도와 연결되면서 씨족의 발상지가 되었고, 그 발상지가 본관으로 굳어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ref name='ksh' />
 
본관제도가 정착된 다른 이유는 씨족의 발상지뿐 아니라 [[고려]] 초의 통치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고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하기 위해 지방 호족을 회유하고 연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태조 23년경에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군현제 개편과 토성분정(土姓分定) 사업을 시행하였고, 광종조에서 호족 정비책, 성종조에서 지방제도 정비책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본관제도가 정착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지방행정제도를 정비하면서 지방 유력 토성(土姓)의 수장에게 행정실무를 맡겼으며, 심지어 일부 군현은 지방의 토성이 ‘호장’직을 세습하며 징세와 지방행정 관리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본관의 양민(백성)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인 허가를 받지 않고 거주지를 이전할 수 없었고, 이전했다가 발각되면 본관으로 되돌려졌다.
 
이처럼 본관의 정착 시기가 주로 신라 말 고려 초이다보니, 대부분의 본관이 신라와 고려의 국경(평양과 원산만) 이남에 존재하게 되었으며,<ref name='ksh' /> 평양과 원산(영흥) 이북에 발상지를 둔 본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변화 ==
 
== 함께 보기 ==
 
== 참고 자료 ==
* 성씨와 본관 : {{뉴스 인용 |저자=김성회 |제목=<nowiki>[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4> 성씨와 본관</nowiki> |url=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1/03/15/20110315004551.html |뉴스=세계일보 |출판사= |위치= |날짜=2011-03-15 |확인날짜=2016-01-09 }}
{{글로벌세계대백과}}
 
== 주석 ==
<references/>
 
[[분류:한국의 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