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조: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Namobot (토론 | 기여)
→‎참고 자료: 봇: 인용 틀 변수 이름 수정
편집 요약 없음
12번째 줄:
1965년 10월 26일, 외무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김동조는 그 후 재일교포들이 그와 같은 진정서를 제출한 것은 교포와 재일교포 사이의 오해에 기인했던 것이고, 그 후 그 오해는 풀렸다고 설명했다. 또 이동원 외무부장관은 김대사가 본부 훈령에 충실치 아니한 점은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같은 날 국회 외무분과위원회는 위원장 [[김동환 (1927년)|김동환]]을 비롯하여 공화당의 [[변종봉]], [[민병기]], [[박현숙 (1896년)|박현숙]], [[박준규 (1925년)|박준규]], [[이만섭]] 의원, 야당의 [[나용균]], [[유진산]], [[강문봉]] 의원은 위 진정서를 검토한 결과, 김대사가 (1) 교포보호에 소흘하고 (2) 본부의 훈령에 충실치 못하며 (3)특정 재벌을 편애하므로 정부가 김대사를 될수록 조속한 시일 안에 해임할 것을 만장일치로 정부에 건의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026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0-26&officeId=00020&pageNo=1&printNo=13543&publishType=00020 | 제목 = 金大使解任건의 | 날짜 = 1965-10-26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1965년 12월 18일 상오 10시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 교환에 김동조는 한일회담수석대표로서 참석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18003292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18&officeId=00032&pageNo=1&printNo=6208&publishType=00020| 제목 = 오늘부터 韓日國交正常化 | 날짜 = 1965-12-18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5년 12월 말, 한국 정부가 주일 대사에 김동조를 내정하자, 12월 23일, 민중당의 [[김대중]] 의원은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 외무위가 만장일치로 그 해임을 건의했으며 재일교포단체에서도 소환을 건의한 바 있는 김동조 대사를 재임명할 수 있는가"를 추궁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30032920102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3&officeId=00032&pageNo=1&printNo=6212&publishType=00020 | 제목 = 獨島領有權따져 | 날짜 = 1965-12-23 | 출판사 = 경향신문 }}</ref><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3002092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3&officeId=00020&pageNo=1&printNo=13593&publishType=00020 | 제목 = 어떻게對處할것인가 | 날짜 = 1965-12-23 | 출판사 = 동아일보 }}</ref> 그러나, 12월 24일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에 대해 정식으로 김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을 요청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5122500329201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5-12-25&officeId=00032&pageNo=1&printNo=6214&publishType=00020 | 제목 = 金東祚大使任命 | 날짜 =1965-12-25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6년 1월 14일, 주한 초대 대사 김동조는 일본 천황에 신임장을 제정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121700329203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12-17&officeId=00032&pageNo=3&printNo=6517&publishType=00020 | 제목 = 日誌1年| 날짜 =1966-12-17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65년~1967년 주 일본 대사를 지냈다.
 
1967년 9월 16일, 대한민국 정부는 김동조를 주미 대사에 임명하여,<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916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9-16&officeId=00020&pageNo=1&printNo=14129&publishType=00020| 제목 = 12國大使任命의결 | 날짜 = 1967-9-16 | 출판사 = 동아일보 |인용문 = 國務會議는 16일 駐美·駐英·駐日·駐獨大使를 포함해서 12개國駐在大使를 새로 任命키로 議決했다. 이날 議決된 大使級의 大幅移動은 朴大統領의 決裁가 나는대로 月內에 發令케 되었다. … ▲駐美 大使〓金東祚(49·外務次官·駐日大使)}}</ref> 김동조는 1967년 11월 9일, 백악관에서 존슨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111000209201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11-10&officeId=00020&pageNo=1&printNo=14176&publishType=00020| 제목 = 金東祚 駐美大使 존슨에信任狀제정 | 날짜 =1967-11-10 | 출판사 =동아일보 }}</ref>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주 미국 대사,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외무부장관, 석유개발공사장을 역임하고 [[1981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외무부장관으로서 김동조는 1975년 3월 초,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압둘 라작라자크 후세인]] 총리와 아마드 리라우덴 외무장관을 만났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0400209201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04&officeId=00020&pageNo=1&printNo=16437&publishType=00020|제목= 金外務 말聯에 도착...오늘 라자크와 會談 |출판사 = 동아일보 | 날짜 = 1975-3-4 |인용문=金東祚外務長官이 4일간의 「말레이지아」방문을 위해 3일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19일간에 걸쳐 「아시아」각국을 순방중인 金長官은 도착후 기자들에게 자기는 4일 「압둘 라자크」「말레이지아」首相 및 「아마드 리라우덴」公報相 겸 外相과 공동관심사를 토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ref> [[2004년]] [[12월 9일]], [[숙환]]으로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라는 그의 책에서, 김동조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의 사례로 기술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ilyosisa.co.kr/SUNDAY/SUN_0350/TM_03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