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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부터 와룡공원까지는 1968년 [[1.21 사태]]가 일어나며 [[청와대]]의 보안을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는데, 1993년에는 창의문이 개방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0200209127007&ed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3-09-02&officeId=00020&pageNo=27&printNo=22275&publishType=00010 자하문 26년만에 일반공개], 《동아일보》, 1993.09.02.</ref> 이후 2006년 4월 1일에는 홍련사에서 촛대바위까지가 개방되었고<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0018861 ’서울이 품 안 가득’ 미리 가 본 북악산 홍련사∼창의문], 《쿠키뉴스》, 2006.03.19.</ref>, 2007년 4월 5일에는 나머지 구간인 촛대바위에서 창의문까지가 공개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97029 북악산 40년 만에 전면 개방], 《연합뉴스》, 2007.04.05.</ref> 창의문에서 말바위까지 구간은 하절기(3월~10월)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동절기(11월~2월)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장을 제한한다.<ref>[http://www.chf.or.kr/c1/sub5_4_2_2.jsp 북악산 한양도성 탐방안내 개방시간]</ref> 이 구간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촬영이 가능하며, 신분증 원본을 지참하여야 출입할 수 있다.<ref group="주">주민등록증, 여권, 운전면허증 원본만 인정된다. 군사시설이므로 사본이나 사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ref>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2570m 구간 가운데 일부를 삼청지구로 지정하여 1975년 9월 18일부터 1976년 10월 21일까지 성곽 1994m와 여장 1403m를 해체·복원하였고, 숙정문에서 혜화문까지 1429m의 성곽을 성북지구로 지정하여 1976년 10월 4일부터 1978년 3월 20일까지 보수함과 동시에 일대 건물을 정비하였다.<ref name="ss283">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p283, ISBN 6000289727</ref> [[경신중학교|경신중]]·[[경신고등학교|고등학교]] 동쪽 담장의 150m 가량은 그 아랫부분이 성곽이다.<ref>[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51408284501290 이사준비하는 경신중·고 담장밑 성곽 옛모습 찾을까], 《아시아경제》, 2013.05.15.</ref> 혜화로6가길 43의 단독주택 담장 아래에 성곽이 2~3단 가량 남아 있는데, 일부분이 성곽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아 집을 지을때 옮겨 쌓은 것으로 보인다.<ref name="hyo178">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178, ISBN 9788958720966</ref> 혜화로6길 72의 단독주택 담장 앞뒤의 계단 쪽으로도 일부 잔존한다.<ref name="hyo178"/>​ 성곽은 본격적으로 창경궁로35나길 50의 '두산빌라'부터 나타나며<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180, ISBN 9788958720966</ref>, 옛 서울시장 공관 담장은 여장이 소실된 성곽이다.<ref>[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1510/e20151025205226144970.htm [역사의 향기<nowiki>]</nowiki> <12> 옛 서울시장 공관], 《서울경제》, 2015.10.25.</ref>
 
=== 낙산구간 ===
2008년 말 경에는 삼선동 일대의 성곽 외벽을 따라 탐방로가 조성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272808 서울 낙산공원 성곽길 복원된다], 《국민일보》, 2007.03.13.</ref> 2011년 1월 11일에는 낙산 북쪽 [[창경궁로]]와 연결되는 부분에 7m 고도차를 극복하는 계단을 포함하여 67m 구간이 추가로 개통되었다.<ref name="jangchung">[http://www.fnnews.com/news/201101110811399632?t=y 서울 성곽 남산 장충동 구간, 낙산 진입부 개방], 《파이낸셜뉴스》, 2011.01.11.</ref> 한편, 낙산공원 정상 일대에는 군 시설, 배드민턴장, 노인정이 성곽과 맞대고 있다.<ref>[http://imnews.imbc.com/replay/2010/nwtoday/article/2541636_13098.html 서울성곽 곳곳 훼손 심각], 《MBC뉴스》, 2010.01.13.</ref>
 
1979년 6월 1일부터 1980년 8월 12일까지 혜화문부터 낙산 정상까지 성곽 1037m와 여장 1033m를 삼선지구로 정하여 복원하였다.<ref name="ss283"/> 또 낙산 정상에서부터 흥인지문까지 성곽·여장 1051m를 동숭지구로 지정하여, 1980년 9월 30일부터 이듬해 8월 1일까지 543m의 성곽을 보수하였고, 1981년 9월 19일부터 이듬해 6월 16일까지 잔여 구간인 성곽 508m와 여장 520.5m를 복원하며 2개의 암문을 개설하였다.<ref name="ss284">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p284, ISBN 6000289727</ref>
 
=== 흥인지문구간 ===
오간수문은 기단부가 발굴되었으나 복원되지 않았고, 축소 모형이 오간수교 옆에 만들어져 있다. 2008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짓기 위한 발굴 조사 중에 멸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던 이간수문과 일대 성곽이 드러났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374066 동대문운동장 이간수문 전모 드러내], 《연합뉴스》, 2008.11.20.</ref> 2009년 10월에 이간수문과 치성 1개를 포함하여 발굴된 142m를 복원하고, 멸실된 123m는 돌을 쌓아 성곽임을 드러내 공개하였다.<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027027021 동대문역사문화공원 27일 부분개장], 《서울신문》, 2009.10.27.</ref> 퇴계로 347의 건물 오른쪽에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41, ISBN 9788958720966</ref> 광희문 남쪽 100m성곽은 가량의광희지구로 성곽은지정되어 1976년 11월 22일부터 이듬해 2월 28일까지 여장을 복원하였으며<ref name="ss284"/>, 2004년경 여장보수 복원이공사가 이뤄졌다진행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55&aid=0000013432 서울시, "광희문 성곽 복원"], 《SBS뉴스》, 2003.12.06.</ref> 장충단로8길 38-15와 장충단로8길 54 사이에는 성곽 일부가 담장으로 쓰인다.<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55, ISBN 9788958720966</ref> 그 외 장충동 일대의 성곽은 대저택 마당 아래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ref>[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872 서울성곽과 '장충단' 깔고 앉은 대저택, 그리고 반공·친일], 《통일뉴스》, 2014.11.27.</ref>
 
1752년 11월 [[어영청]]의 [[홍봉한]]이 [[청계천]]을 파내고 [[치성]]을 축조하자고 건의하였다.<ref>《영조실록》 영조 78권 28년 11월 28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811028_001&tabid=k 어영 대장 홍봉한이 도성 안의 개천을 파고 성을 축조해야 한다고 청하다]</ref> 다음달에는 [[우의정]] [[김상로]]의 주장에 따라 흥인문과 광희문 사이에 치성 5개를 쌓기로 정하였다.<ref>《영조실록》 영조 78권 28년 12월 3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812003_001&tabid=k 대신들과 성을 축조하는 일을 의논하다]</ref> 이듬해 5월 24일에는 치성 축조를 끝마쳐 홍봉한에게 상을 내렸다.<ref>《영조실록》 영조 79권 29년 5월 24일,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ua_12905024_001&tabid=k 좌의정 이천보 등이 친히 비를 빌겠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ref> 그런데 실제 광희문 북쪽에 위치한 치성은 4개였던 것으로 보인다.<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43, ISBN 9788958720966</ref> 흥인지문 남쪽과 청계천 사이에 1개, ​청계천과 DDP 사이에 1개, DDP 안에 1개, 한양공고 자리에 1개가 있었고, 광희문 남쪽에도 1개가 있었다.<ref name="hyo244">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44, ISBN 9788958720966</ref> 이 가운데 청계천 북쪽에 있던 치성은 1907년 오간수문을 헐며 같이 철거되었다.<ref name="hyo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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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1일에는 신라호텔, 서울클럽(110m), 민주평화통일자문협의처(130m)를 지나는 성곽 안쪽 탐방로 1090m가 개방되었다.<ref name="jangchung"/> 또 반얀트리클럽호텔(옛 타워호텔) 내부 구간에는 성곽이 없으나, 같은 달 말 호텔에서 조성한 450m 구간 탐방로가 열렸다.<ref>[http://www.khan.co.kr/kh_news/art_view.html?artid=201101121846441&code=950201 서울성곽 장충동 남산 탐방로 개통], 《경향신문》, 2011.01.12.</ref> 타워호텔 쪽의 성곽은 [[김수근]]이 설계한 자유센터(현 남산제이그랜하우스)를 건설할 때 건물의 축대로 옮겨 사용하였다. 한편, 장충체육관부터 반얀트리클럽까지 성곽 바깥쪽에서 보이는 각자를 북쪽부터 차례로 나열하면 해진시면(海珍始面), 함안시면(咸安始面), 생자육백척(生字六百尺), 의령시면(宜寧始面), 경산시면(慶山始面), 연일시면(延日始面), 흥해시면(興海始面), 순흥시면(順興始面), 하양시면(河陽始面), 기장시면(機張始面), 울산시면(蔚山始面), 수자육백척(水字六百尺), 예천시면(醴泉始面), 곤자육백척(崑字六百尺), 성주시면(星州始面), 선산시면(善山始面)이다.<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72-273, ISBN 9788958720966</ref> 성곽 돌로 쌓인 반얀트리클럽 본관 건물 후면 축대에는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 각자가<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63-264, ISBN 9788958720966</ref>, 자유센터 정문 안 축대에는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 각자가<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70, ISBN 9788958720966</ref>, 자유센터 담장에는 경주시(慶州始) 각자가 있다.<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271, ISBN 9788958720966</ref>
 
장충체육관에서 남산 동쪽까지 1053m를 장충지구로 지정하고, 남산 일대 1639m를 남산지구로 지정하여, 1977년 10월 4일부터 1978년 12월 31일까지 성벽과 여장을 복원하였다.<ref name="ss284"/> 2010년 7월 29일에는 아동광장 부근 84m의 성곽과 본래 지형이 복원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3364466 서울시, 남산회현자락 재정비사업 1단계 완료], 《뉴시스》, 2010.07.29.</ref> 2012년 6월 9일에는 백범광장 부근 239m의 성곽과 지형이 복원되었다.<ref>[http://news1.kr/articles/?695703 서울시, 남산 회현자락 지형·성곽 2단계 복원 완료], 《뉴스1》, 2012.06.08.</ref> 2014년 8월에는 189m의 성곽과 내자육백척(柰字六百尺) 각자, [[조선신궁]] 배전의 콘크리트 기초부가 함께 발굴되었다.<ref>[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813_0013105978&cID=10201&pID=10200 회현동 일대 한양도성 189.3m 발굴 마무리], 《뉴시스》, 2014.08.13.</ref>
 
=== 숭례문구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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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구간 ===
서울시복지재단 서쪽 담장 아래에 성곽이 여장 없이 남아 있다.<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98, ISBN 9788958720966</ref> [[월암근린공원]] 부근 140m는 복원하여 2011년 10월 2일 개방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4110203 '조선시대 성곽변천사를 한눈에…'], 《뉴시스》, 2011.10.02.</ref> 송월1길 44-24 세원빌라부터 송월1길 44-30 홍파빌라까지의 건물 주차장 뒤편으로는 성곽이 보이는데, 이 구간은 주택의 축대로 쓰인다.<ref>김도형, 《순성의 즐거움》, 효형출판, 2010, p101, ISBN 9788958720966</ref> 인왕산을 오르는 구간은 1.21 사태 이후 통제되었으나, 1993년 민간에 개방하였다.

돈의문 북쪽에서 창의문까지의 1626m 구간을 청운지구로 지정하여, 1977년 12월 26일부터 이듬해 7월 15일까지 203.5m를, 1978년 4월 12일부터 이듬해 6월 30일까지 1242.5m를, 1979년 7월 1일부터 이듬해 4월 30일까지 120m를 복원하였다.<ref name="ss285">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p285, ISBN 6000289727</ref> 1996년에는 국사당과 치마바위 사이의 56m 구간을, 이듬해에도 같은 위치의 성곽 중 45m를 보수하였다.<ref name="ss285"/> 2007년 하반기에는 약 300m 구간이<ref>[http://imnews.imbc.com/replay/2007/nwdesk/article/2072664_18813.html 서울 옛 모습 찾는다], 《MBC뉴스》, 2007.09.23.</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7&oid=078&aid=0000037257 인왕산 시민의 곁으로 돌아오다], 《정책브리핑》, 2007.10.10.</ref>, 2008년 12월에는 인왕산 정상 서측의 283m 구간이<ref name="09sn">[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209007005 [서울성곽 복원 현장<nowiki>]</nowiki> 공사 어디까지 진행됐나], 《서울신문》, 2009.02.09.</ref>, 2009년에는 인왕산 동측의 일부가<ref name="09sn"/>, 2010년 12월에는 범바위 일대 치성 등이<ref>[http://www.dailian.co.kr/news/view/232784 ´가장 완벽한 치성´ 인왕산 성벽 복원하다], 《데일리안》, 2011.01.02.</ref> 차례로 복원되었다.
 
== 순성 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