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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혁명]]을 맞이한 서유럽 각국은 [[대량생산]]된 공산품의 수출을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인도]]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와 [[중국 대륙]]의 [[청나라]]에 대한 시장 확대를 서두르고 있었지만, 이것은 치열한 식민지 획득 경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시장 확대 경쟁은 [[영국]]이 우세를 보이고 있었고, [[프랑스]] 등이 앞서 있었으며,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거점이 없는 미국은 뒤쳐지고 있었다.
 
그 후 미국은 [[1833년]]에 특사 [[에드먼드 로버츠]]를 파견한 성과로서, [[라따나꼬신 왕국]] 및 [[:en:Muscat and Oman|머스캣 앤드 오만]]과의 통상 조약을 간신히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1834년에 미국으로 돌아간 에드먼드 로버츠는 국무장관 [[:en:Louis McLane|루이스 맥레인]]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보고서에서 그는 "조선 및 북부 중국과 통상을 여는 길은 먼저 일본과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미국은 [[에도 막부]] 및 [[청나라]]와의 협약 체결을 위해 에드먼드 로버츠를 특사로 파견하였다.([[1835년]]) 이때 동인도 함대가 설립되어 있다. 그런데, 1836년 에드먼드 로버츠가 마카오에서 병사<ref>{{서적 인용|제목=The Korean struggle for International identity in the foreground of the Shufeldt Negotiation : 1866 - 1882 |url= https://books.google.co.kr/books?id=hRAPN6SZqKUC |저자=Woong Joe Kang |isbn=9780761831204 |쪽=79~80}}</ref>하여,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미국은 [[1833년]]에 [[샴]](현 [[태국]])과 [[무스카트]](현 [[오만]]의 수도)와의 조약을 간신히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1835년]]에는 [[일본]]과 [[청나라]]와의 협약 체결을 위해 특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이때 동인도 함대가 설립되어있다.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아편 전쟁]] 이후 [[1842년]]에 청나라 사이에 〈[[왕샤 조약]]〉 을 체결하여 중국 시장에 진출하게 된다. 이 조약의 비준을 위해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이 청나라에 파견되었지만, 제임스 비들은 일본과의 조약 협상의 임무도 띠고 있었다. 따라서 [[1846년]] 우라가에 내항을 했지만, 조약을 맺을 수 없었다.
 
그 후 미국은 [[1833년]]에 [[샴]](현 [[태국]])과 [[무스카트]](현 [[오만]]의 수도)와의 조약을 간신히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1835년]]에는 [[일본]]과 [[청나라]]와의 협약 체결을 위해 특사를 파견하기로 하고, 이때 동인도 함대가 설립되어있다.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하지만, [[아편 전쟁]] 이후 [[1842년]]에 청나라 사이에 〈[[왕샤 조약]]〉 을 체결하여 미국은 중국 시장에 진출하게 된다. 이 조약의 비준을 위해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이 청나라에 파견되었지만, 제임스 비들은 일본과의 조약 협상의 임무도 띠고 있었다. 따라서 [[1846년]] 우라가에 내항을 했지만, 조약을 맺을 수 없었다.
 
===보급 기항지 확보===